“57세 남자. 광범위 회전근개 파열(massive rotator cuff tear). 작년에 산악자전거 타다 세게 넘어졌다. 얼마 전 할리 데이비슨 동호인들끼리 간 미국 대륙 횡단 여행에서 또 한 번 모지게 넘어졌다. 그때부터 팔을 못 든다. 스포츠 애호가.
57세 남자. 광범위 회전근개 파열(massive rotator cuff tear). 작년에 아는 형한테 몹시 맞았다. 얼마 전 시설에 사는 사람들한테 또 모지게 맞았다. 그때부터 팔을 못 든다. 알코올 애호가.”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사람. 서울시립동부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 김현정(46) 박사는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 성남 ‘분당’과 서울 ‘용두동’에서 진료를 한 적이 있었다. 대리석과 붉은 카펫이 깔린 주상복합건물의 전문 클리닉과 소독약 냄새와 취객의 욕설이 뒤섞인 공공병원을 오가며 그는 ‘두 병원에서 보는’ 삶의 간극이 30년쯤 벌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최근 펴낸 (느리게읽기 펴냄)에서 이때를 이렇게 적었다.
“용두동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아직 1970년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근대인으로 살기는 어렵지 않다. 르네상스인으로 살기도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동시대인으로 사는 일이다.” ‘동시대인’으로 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용두동(서울시립동부병원)에 남았다.
사실 그녀의 이력은 메이저 대학병원에 더 잘 어울린다. 세브란스병원이 배출한 최초의 여자 정형외과 전문의 1호인 김 박사는 2001년 미국 코넬대학병원 근무 당시 박태준 전 총리의 뉴욕 자문의로서 수술 전후와 회복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2002년부터 4년 동안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또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화이자제약 의학부장 및 존슨앤존슨메디칼드퓌사업부 아태총괄 의학감독을 역임했다. 그런 그녀가 왜 의사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 공공병원 의사를 자처했을까.
“다른 대학병원에 비해 공공병원이 좀더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해서 오게 됐어요. 물론 대학병원에도 소명 의식을 가진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많이 계시지만 제 나름대로 이게 맞다 싶어 왔죠.” 소신도 좋지만 벌이나 이름값을 생각하면 아쉽지 않을까. “큰 병원일수록 의사들이 자유롭지 않아요. 대학병원에서는 진료 실적과 연구비 유치 실적으로 의사를 평가하죠. 예전에는 의사가 갑이었는데 이제는 의사가 제약회사에 가서 연구비를 달라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실적들로 인센티브를 주고요. 안타까운 일이죠.” 결국 ‘자유’에는 ‘희생’이 따르는 셈인가.
의사들은 검진도 수술도 잘 받지 않아
하긴 그녀의 삶에서 자유는 잊혀질 만하면 찾아오는 ‘신열’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레지던트 시절인 1995년 가족과 주변의 만류에도 홀로 아프리카로 날아가 케냐 키쿠유 지역에서 3개월 동안 의료 활동을 펼친 것이나, 2005년 잘나가던 대학병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2년 동안 놀다 2007년 인도 고대의학인 아유르베다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훌쩍 떠난 것도 그녀의 자유인 기질이 낳은 기행일 터. 아유르베다는 병의 원인을 환부만이 아닌 인간의 몸 전체로 바라보는 전인치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보통 정신과에서 마음치료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의료의 모든 분야에서 환자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치료가 전제돼야 해요.”
스스로 이상주의자라고 밝힌 그녀가 마냥 낙천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동종 업계에서 ‘따’당할 각오를 하고 상업화에 눈먼 한국 의료계의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최근 나온 ‘의료 비즈니스 혁신 모델’에는 기본 전제부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환자를 의료 주체로 보는 게 아니라 싼 가격과 편리함만 좇는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철학의 부재가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는 불안을 조장하는 악당이 많다. ‘겁나시지요? 검사받으세요. 수술받으세요. 새로 나온 신약이에요. 외국에서 물 건너온 기가 막힌 제품이에요. 걱정되시지요? 보험에 드세요, 아주 쌉니다….’ 이런 의료 상술에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싶었다.” 온화한 외모와 달리 글이 맵다.
대학병원들이 신수종사업으로 여긴다는 건강검진센터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보탠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고 검진해서 이상 안 나오는 사람 없다. 찾으면 찾을수록 나온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못 찾고 대수롭지 않은 것만 찾아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검진이 모든 병을 밝혀내는 요술망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들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까? “의사들은 정작 건강검진을 잘 안 받는다. 인공관절·척추·백내장·스텐트·치아임플란트 등 그 흔한 수술도, 항암치료 참여율도 낮다. 마치 손님들에겐 매일 기름진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요리사가 정작 자신은 풀만 먹고 사는 꼴이다.”
왜 그럴까? 김 박사에게 직접 물었다. “첫째, 잘 알기 때문이죠. 의료란 양날의 칼과 같거든요. 혜택뿐만 아니라 한계와 허상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섣불리 몸을 맡기지 않는 거죠. 둘째는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픈 것을 참지 않잖아요. 되도록 빨리, 당장 낫게 해주기를 바라죠. 하지만 근원적인 치료는 자신이 하는 것이며 여기엔 시간이 걸리거든요. 셋째,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의료에는 정답이 없는 사례가 허다해요. 그러나 정부의 진료 지침, 학회 권장 가이드, 병원 경영 지침, 보험회사 수급 기준, 명예욕 등의 장치와 압력 때문에 무리한 처방을 하게 되죠. 의사들은 자신에 대한 처방 때 비로소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거든요.” 김 박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결코 의료 무용론은 아니라며 꼭 필요한 검진과 수술도 있다고 누누이 덧붙였지만, 그녀의 선의를 오해하긴 어려웠다.
의료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이 들어 있다고 이 책이 딱딱하고 차가운 사회비평서는 아니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은 부드럽고 따뜻한 자전적 에세이로 읽힌다. 김수영·이상의 시를 인용하고 슘페터·토크빌을 언급하며 자신이 직접 그린 정감 어린 일러스트까지 넣은 재미있는 이 책의 해법은, 7가지 ‘영(0)차 의료’. 1·2·3차 의료기관을 찾기 전 순서상 0순위인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힘과 역할을 찾고 키우자’는 것이다. 7가지는 이렇다. “마음의 힘을 키운다. 몸을 많이 움직인다. 인공에 반대한다. 경증에 지혜롭게 대처한다. 미니멀리즘(최소주의) 의료를 실천한다. 보험을 남용하지 않는다. 느리게 산다.”
의료인들 각성 촉구하는 다음 책 준비지혜와 영감을 주는 남편 다음으로 책읽기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의료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료 에세이 2탄을 준비하고 있다. 부모 뜻에 따라 의대를 진학했지만, 문과대에 가서 글을 쓰고 싶었던 소녀의 꿈이 여전히 녹슬지 않은 덕이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을 즐겁게 해나가고 있는 착한 이상주의자 의사를 보며, “의학은 넓은 의미의 사회과학이고, 사회과학은 넓은 의미의 의학”이라는 독일의 세포병리학자 루돌프 비르히의 말뜻이 새삼스러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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