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공단(현 디지털산업단지) 근처 구종점이라는 곳 근처에서 20여 년을 살고 있다. 지금은 가산동이라고 불리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리봉동이었다. 우연히 길목에서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은 “어디 가서 가리봉동 산다고 하지 마라. 사람 취급 못 받는다”고 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상경해서 안 해본 것 없이 굴러다니다 지금은 분식집 주방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죽하면 구청장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 ‘가리봉동’이라는 행정명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간택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구종점 언덕에 지금도 새벽이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진풍경’이라니,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싶다. 다름 아닌 새벽 인력시장이다. 새벽 5시 무렵에 우 몰려들었다 6시면 벌써 파장이 되고 마는 깜짝시장. 근처 닭장촌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벌이를 위해 작업복 가방 하나씩을 메고 뻘밭의 게들처럼 구물구물 구종점을 향해 모여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생을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싶다. 조적 다섯, 목수 넷, 곰빵 셋, 방통 넷, 공구리 열, 철근 셋, 도비 둘, 봉고차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와 서고, 누군가 일거리를 호명할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리며 간택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풍경이 아팠다.
이렇게 새벽에 잠깐 모였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에 의해 어떤 곳에선가는 빌딩이 올라가고, 공장이 세워지고, 도로가 닦일 테지. 어둔 새벽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구종점에 날이 서서히 밝으면 마치 다른 하나의 세계가 열리듯 조금은 더 행복해 보이는 듯한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물론 내가 사는 동네에도 진보정치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많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도 많다. 십수 년 전부터는 합법정당운동을 한다고, 선거에 참여한다고 지역운동·주민운동을 말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왠지 이 새벽 사람들은 관심 밖인 것 같아 쓸쓸하다. 나도 가끔은 이런 이들을 잊고 조금은 깨끗하고, 투명하고, 밝은 사람들의 곁에 서고 싶다.
지금은 대부분이 조선족 동포 노동자들이다. 얼마 전부터 내가 깃들여 살고 있는 지하와 옥탑을 가진 2층 건물에 총 10가구 정도가 세들어 사는데 언뜻 보니 대부분 동포 노동자들이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거개도 동포 노동자들이고 보면 가끔은 한국민인 내가 이 골목에서는 이방인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기껏 구주택으로 장마철마다 지금도 집 여러 군데에 물이 새 바가지를 대놓아야 하는 전셋집이지만 그중 가장 큰 집이 내가 살고 있는 곳이고 보면 나도 이젠 삶을 조금은 더 겸허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우리는 동시대를 함께 사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 때가 많다. 현대를 살면서 중세 봉건시대를 사는 사람도 있고, 무슨 왕조시대를 사는 이도 있는 듯하다. 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반공주의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도 많다. 어떤 이는 다른 모든 이들의 노동의 결실을 독점해 미래를 앞당겨 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난의 굴레 탓에 죽어라고 일해 과거의 결핍 부분을 메꾸는 데 전생을 바쳐야 하기도 한다.
답은 권력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쌍용차와 강정과 재능과 콜트·콜텍, 장애인 농성장 등 탄압받고 저항하는 민주주의 현장에서 죽어라 연대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는 반면, 때 되면 현장의 눈물과 고투와 헌신과 희생의 대가를 손쉽게 자신의 특권을 위한 전리품으로 수렴해가는 희멀건한 정치꾼들의 세계가 있기도 하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는 지금, 당신은 어떤 세계를 선택하고, 살 것인가. 답은 권력에 있지 않고, 삶에 있음을 다시 다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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