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여름은 만만치 않다. 더구나 뜨거운 7월의 햇살에 바싹 구워진 카스티야의 흙먼지 날리는 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런데 이 황량한 길을 무려 400km나, 오직 걸어서 횡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160여 명의 아스투리아스 광부였고, 이들의 목적지는 수도 마드리드였다.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가득한 광장
7월11일 이들은 드디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시골 광부들. 그러나 결코 피로와 고통, 외로움에 압도당한 모습은 아니었다. 6월22일에 도보 행진을 시작한 이후 꼬박 20여 일의 여정은 이들에게 놀라운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거기에는 행진단에게 음식과 물을 내주고 잘 곳을 마련해주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광부들을 도우며 사람 목숨값이 은행 장부 숫자보다 못한 시대에 온몸으로 항의하려는 것 같았다. 그 목숨값 문제 때문에 고행에 나선 광부들은 새삼 자신이 더 큰 ‘우리’의 한 부분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행진단을 맞이한 것은 경찰 기동대였다. 경찰은 고무총탄을 쏴대며 이들의 수도 진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공격으로 주저앉을 광부들이 아니었다. 7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지만, 결국 경찰 저지선은 뚫렸다. 광부들은 이미 고향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촌에서도 경찰과 치열하게 맞붙은 적이 있다. 그때도 경찰은 광부들이 만든 새총과 사제 로켓포 등의 방어 무기에 맥을 못 추었다. 오랜 탄광 생활 경험에서 나온 전투력이었다.
광부들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향한 마드리드의 중심 광장 푸에르타델솔에서는 경찰의,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정부의 이 퉁명스런 환영식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이 이들을 맞이했다. 도보 행진단의 마드리드 도착에 맞춰 버스를 타고 달려온 고향의 가족과 동료들이 그곳에 있었고, 또 다른 탄광 지대 아라곤에서 출발한 60여 명의 도보 행진단도 의기양양하게 광장에 입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1천여 명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바로 ‘분노한 자들’ 혹은 ‘5월15일 운동’이라 불리며 2011년 전세계적인 점거(Occupy) 운동의 구심 역할을 한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지난해 초에 푸에르타델솔 광장에 천막을 치고 무단 점거 농성을 시작해 1년 넘게 이를 유지하고 있다. 당국이 끊임없이 해산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분노한 자들’은 다시 모여들어 광장을 재점령했다. 이제 이들의 대열에 북부 산악지대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합류했다. 광부들을 맞이하며 젊은이들은 이미 유명해진 자신들의 구호를 힘껏 외쳤다. “우리가 99%다!”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가? 스페인은 현재 유럽 재정위기의 가장 중요한 고리다. 스페인의 국채 금리는 7% 수준에서 영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만큼 부동산 거품으로 인한 국내 경제위기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구제금융을 끌어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고, 유럽 금융세력은 그리스에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에도 대규모 긴축을 요구했다. 1천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의 대가로 스페인 정부에 국내총생산(GDP)의 8.9%에 달하는 대대적 긴축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새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7월11일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종합긴축대책을 발표했다. 재정 삭감 총액은 650억유로, 무려 90조원 이상이다.
실업률 24% 나라에서 재정 삭감이라니
이 정도 재정을 삭감하자니 세금은 올리고 지출은 줄일 수밖에 없다. 정부 지출 중에서 가장 쉽게 손댈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나 예외 없이 복지 예산이다. 라호이 정부 역시 복지 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실업급여 지급액을 깎았고, 퇴직 연령을 68살로 올렸다. 사회서비스 예산도 칼질을 당했다. 이미 실업률이 24%에 달하는 나라에서 정부가 일체의 경기 활성화 수단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스의 오늘이 점점 더 스페인의 내일이 돼가고 있다.
정부의 긴축정책 발표는 그렇지 않아도 잔뜩 끓어오르던 민심에 불을 붙이는 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노한 이들이 바로 광부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산 삭감 목록 중에는 석탄 채굴 기업에 지급되던 정부 보조금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삭감 폭은 63%에 달한다. 값싼 수입 석탄과 경쟁해야 하는 스페인 탄광업에 이 정도 규모의 보조금 삭감은 곧 탄광 폐쇄를 뜻한다. 광부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을 위협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광부들이 투쟁에 나선 직접적 이유다. 보수 언론 식으로 보면 전형적인 ‘밥그릇 지키기’ 싸움이다. 정부 보조금으로 먹고 사는 산업은 벌써 퇴출됐어야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이에 맞서 탄광노조 쪽은 에너지산업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에너지산업은 농업과 마찬가지로 사회 존립의 필수 요소다. 따라서 가격경쟁력만으로 접근할 게 아니다. 비록 가격경쟁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국내 탄전들을 폐쇄하지 않고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국제 에너지 위기 같은 비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탄광 노동자들은 이런 에너지 생명줄을 지키는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광부들의 주장이다.
이런 사회적 정당성 이전에 사실 광부들의 처지 자체가 급하다. 스페인 북부 산간지대에 위치한 탄광촌들의 사정을 알면, 누구나 투쟁에 나선 광부들에게 부정적인 시선만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탄광 노동자들의 임금은 월평균 170여만원이다. 그런데 이런 저임금 일자리마저 없어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네 사람 중 한 명꼴로 실업자인 현재 스페인 상황에서 이는 곧 언제 다시 일자리를 얻을지 기약할 수 없는 장기 실업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아스투리아스나 아라곤 같은 산간 벽지에는 탄갱 외에 다른 일터도 별로 없다. 탄광업이 정리되면 아마도 지역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보 행진단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그들에 대한 연대와 지원이 답지한 이유이고, 푸에르타델솔 광장의 ‘분노한 자들’이 이들을 형제, 자매로 맞아들인 이유다. 이들에게 아스투리아스 광부들은 나라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제 밥그릇 지키는 데만 골몰한, 머리에 뿔난 사람들이 아니다. 내일의 모든 스페인 민중의 모습, 나 자신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이들이다. 광부들은 단지 남보다 조금 더 먼저 투쟁에 나섰을 뿐임을 많은 이들이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 아스투리아스 10월 혁명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스페인 현대사의 잊지 못할 한 사건. 아스투리아스 광부들의 투쟁에는 이 사건의 역사적 기억이 짙게 배어 있다. 1934년 가을, 스페인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2008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지금 스페인을 강타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스페인 사회를 뒤흔들고 있었다. 공화파, 사회주의노동자당, 아나키스트, 공산당, 트로츠키주의자, 카탈루냐 자치파 등으로 이뤄진 좌파와, 왕당파 및 파시스트를 중심으로 한 우파가 첨예하게 맞섰다.
총파업도 이 대립에서 비롯됐다. 파시스트들이 내각에 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자 이에 반발해 사회주의노동자당(지금은 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지만 1930년대에는 혁명적 노선을 걷고 있었다) 중심의 노동자총연합(UCT)과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총연맹(CNT)이 총파업을 단행한 것이다.
다른 지역의 파업은 이내 진정되었다. 하지만 유독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지역에서만은 투쟁이 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했다. 파시스트들이 아스투리아스로 집결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10월4일 광부들은 총을 들고 나섰다. 이들은 이틀 만에 주요 산업도시 라펠구에라를 비롯한 아스투리아스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광산 노동자들이 점령한 도시는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하지만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낯선 분위기가 지배했다. 스페인 사회를 짙게 내리누르던 온갖 봉건적 특권과 유습은 폐지됐다. 혁명위원회가 들어서서 행정을 대신했다. 중요한 사안들은 주민 총회를 통해 결정했다. 기존 화폐는 쓸모없게 됐고 혁명위원회가 발급한 쿠폰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필수품들은 아예 거래 없이 배급되었다. 세계 대공황이 5년째에 접어들던 당시 스페인의 이 산악지대에는 자본주의의 위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아래로부터의 실험이 시작된 것 같았다.
하지만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2주 뒤 군대의 잔인한 진압이 시작됐다. 3천 명의 광부가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감옥에 갇혔다. 스페인 현대사에 ‘아스투리아스의 10월 혁명’으로 기록된 사건은 이렇게 해서 끝났다. 진압 작전을 지휘한 것은 2년 뒤 합법 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래서 스페인 전역을 내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이후 30년 넘게 독재자로 군림하게 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었다. 아스투리아스의 10월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20세기 초가 아니다. 경제위기의 깊이가 그때와 견줄 만하더라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곳곳에서 무장 충돌이 빈발하던 무렵과 지금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 광산 노동자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집단적 희망 분출의 의미
또 하나 다르지 않은 것은 체제의 위기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위협해 뜻하지 않게 자극한 대담한 희망이다. 70년 전 그것은 아스투리아스 광부들의 민중 자치, 민중 권력으로 폭발했다. 오늘날 이들의 후예와 마드리드의 분노한 젊은이들이 함께 만난 푸에르타델솔 광장에는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이라는 구호가 가득하다. 세월을 뛰어넘는 이 집단적 희망 분출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 이것이 이제 스페인만 아니라 모든 지구인의 과제가 되고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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