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늦은 퇴근길에 우유를 사러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포인트카드 있으세요, 현금영수증 해드릴까요…?”
살뜰히 챙겨 물어보는 계산원에게 “아니요, 그냥 주세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다가 목소리가 하도 명랑해 슬쩍 얼굴을 봤다. 이제 스물한둘 돼 보이는 앳된 아가씨였다. 서비스직이라 그런지 곱게 화장을 했지만 복숭아 같은 뺨 위로 솜털이 새순처럼 보송보송 돋아 있고, 손가락으로 볼을 꾸~욱 하고 누르면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톡 하고 튀어오를 것 같은, 말 그대로 싱그러운 젊음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font color="#1153A4"> 너무 일찍 끝나버린 달콤한 인생</font>
‘이 밤중에도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구나… 어려서 그런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웃어 보이며 안녕히 가시란다. 밤늦도록 저렇게 서서 하루 종일 예쁜 웃음 지으며 한 달에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그 돈으로 뭘 할까. 퉁퉁 부은 다리로 집에 돌아간 저 아가씨는 무엇을 할까. 평소 읽고 싶던 책을 읽을까, 아니면 너무 고단해 그대로 잠자리로 들까. 한 손에 우유 한 통을 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며 별별 생각을 다 하다 문득, 나는 잔인하게도 저 아가씨가 차라리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험생 시절, 나는 나름 예민한 사춘기 소녀였다. 교실 창문으로 꽃이 피는 교정을 바라보며 봄이 오는구나, 신록이 물드는 걸 보며 여름이 오는구나 하며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내 마음속에도 그렇게 꽃이 피었다가 비가 왔다. 그 시절엔 되고 싶고,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그때 내가 상상한 청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새롭게 나오는 문화 공연을 보고,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배낭을 둘러메고 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가고, 삶의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갈 거라고 상상했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 대학생이 되고, 작가도 되고, 야생동물 보호가도 되었다. 단, 모든 것은 입시가 끝나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 유보되었다.
하지만 그 꿈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등록금과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방학은 물론 학기 중에도 식당·호프집 서빙에서부터 신발공장·딸기공장·호텔·백화점 등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결국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넘기지 못하고 휴학을 하고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학 3년 동안 내가 꿈꾸던 캠퍼스의 낭만은 고작 잔디밭에서 마시던 소주잔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 ‘사회에 나가 자리잡고 나면 좋아질 거야’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구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정작 사회에 나왔을 때 그들의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들이 꿈꾸는 인생을 선사하지 못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라는 기대감은 어제만 같아라는 적당한 포기와 안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럴듯한 자기만의 이유와 위로들로 포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턴가 나 또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나는 내 청춘이 너무 보잘것없이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다.
<font color="#1153A4"> 뒤통수를 후려친 후배의 말</font>
그런데 며칠 전 어릴 적부터 알아온 동생과 저녁을 먹었다. 한참 동안 만나지 못한 그 동생은 그동안 간호학원을 다니고, 최근에는 조그만 개인병원에 취직까지 했단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변변한 직장도 없이 한참을 놀던 그 동생은, 출산 뒤 육아휴직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언니를 대신해 조카를 키우는 일을 했다. 마땅히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던 언니와, 용돈이라도 벌어야 할 백수 동생은 서로가 윈윈하는 관계라며 자위했다.
하지만 그 동생은 조카를 돌보는 1년 동안, 시집도 안 간 여자가, 그것도 한창 밖에서 일해야 할 젊은 사람이, 저렇게 집에서 애나 보고 있어서 어쩌냐는 주변의 한숨 섞인 걱정과 핀잔, 눈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 시간 끝에 얻은 직장이라 그런지 동생은 약간은 들뜨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 좋게 취직 턱을 내겠다는 동생에게 나는 눈치도 없이 “월급은 얼마나 주냐, 계약직이냐,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냐”며 밥맛 떨어지는 질문만 해댔다.
처음의 들뜬 목소리와 다르게 점점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던 동생은 갑자기 말했다.
“언니, 나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요즘 나처럼 사는 사람이 뉴스 보니 100만이 넘는다고 하더라.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그냥 인생 포기한 듯 사는 게 맞는 건가? 나는 내 조건에서 다른 사람들 맘 아프게 안 하고, 거짓말 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거다. 돈이야 얼마 안 되겠지만, 월급 타는 날에는 남자친구랑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남들한테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대화가 끝나고 나는 그 동생을 볼 낯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날 저녁 마트에서 만난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감정으로 내 마음대로 그 아가씨의 꿈과 인생을 재단했다 싶어서였다.
남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저런’ 삶 속에서도 행복이 있고, 희망이 있고, 삶은 이어지고 있었다. 고난이나 역경은 그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 서보면 그 절망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 매일 세끼 밥을 올려보내고 그와 세상을 잇는 메신저가 되어야 했던 지난 한 해, 한진중공업의 그 끔찍했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내게 어떻게 그렇게 사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면 ‘그냥요, 괜찮아요, 지낼 만해요’ 하고 웃어넘겼다.
<font color="#1153A4"> 최악의 시간에도 나비는 날아든다</font>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매일같이 힘들기만 했다면 어떻게 버텼을까. 그곳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나비와 새가 날아들고, 가끔 웃을 일도 생기며 그렇게 버텨지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그러는 사이 희망이라는 씨앗이 뿌려지고, 승리라는 열매가 맺혔다.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고, 누군가는 청춘이라는 이름이 시리고 한순간의 불꽃 같다고 하지만 청춘은 늘 꿈꾸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꿈에 당당하고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는 것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동안 내 청춘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속, 생각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청춘이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속에 두려움과 주저함, 무력감과 맞설 수 있는 용기, 스스로 깨어 있는 지성,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따뜻한 감성만 잃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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