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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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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마저 식민화한 자본 폭력

감옥에서 보낸 편지-③
등록 2012-02-03 16:19 수정 2020-05-03 04:26

얼마 전 연재가 끝난 의 ‘10대가 아프다’는 정말 좋은 기획이었다. 아니, 아픈 이야기들이었다. 천진난만하고 밝아야 할 10대 아이들 대부분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고립된 섬처럼 외롭다는 것이었다. 집단적으로 깊이 병들었다는 것이었다. 첫 회에 소개된 한 중학생 아이의 사연은 10대들의 고립과 소외감이 어떤 지경인지를 잘 말해주었다. 어디에서도 그늘과 친구를 찾기 힘들었던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탁했던 것은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껴안고 자던 ‘곰인형’과 유일한 놀이 상대였던 ‘아이팟’을 함께 묻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따뜻한 체온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작 따뜻한 심장과 손길이 없는 곰인형과 아이팟에 우리 아이들을 내맡겨야 하는,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은, 부모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이 시대의 교사들은, 랍비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도대체 이 시대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파괴당한 인성과 복제된 폭력

마음이 무너져 있는데 다시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대구의 한 중학생 아이가 몇 달 동안 이어진 동료 학생들의 왕따와 폭력을 그만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 난간 아래로 몸을 내던진 것이었다. 자살을 선택할 만큼 용기가 있었지만 정작 아이는 자신의 아픔과 고민을 주변의 누구에겐가 믿고 의지하며 털어놓을 용기를 가질 순 없었다. 왜였을까? 그것이 단지 심약한 아이만의 문제였을까? 극한의 보복폭력에 대한 (아이의 처지에서) 공포 때문만이었을까?

안타까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전체 사회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이 특집으로 우리 시대 아이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개탄하고 반성하고 꾸짖고 돌이켜보는 입과 말이 쏟아져나왔다.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해보고 대안들을 논했다. 수사는 전국의 학교로 넓혀지기도 했다.

그러다 차츰차츰 여론의 중심에서 밀려나 기사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 오늘, 도대체 어떤 반성과 대안이 마련됐을까? 기억에 남는 것은 자극적인 몇 가지 장면과 언사뿐이다. 형사처벌 대상 연령을 14살로 낮추면 정말 되는 걸까? 학교마다 전담 경찰관을 배치하면 되는 걸까? 무기명, 비밀 고발 제도를 잘 완비하면 되는 걸까? 선생님들에게 다시 강력한 체벌 권한을 주면 되는 걸까? 초·중학교 일진들과 무슨 범죄와의 전쟁이라도 벌리면 되는 걸까? 호들갑은 많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본질에선 다시 한참 비껴선 듯하다. 수구보수 언론들과 교육계는 한술 더 떠 이 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통과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폐기와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교조 선생님들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기도 했다. 그 외의 모든 문제는 일부 악한 학생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어디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친구 같은 엄마·아빠가 되돌아왔다는 소식이 없고, 그런 선생님이, 학교가, 공동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없다. 가장 큰 학교 폭력인 ‘성적순’을 찢어버렸다는 소식 하나 없고, 대입경쟁 체제와 일종의 신분제와 다름없는 학벌주의·학연주의를 걷어내기로 했다는 립서비스 소식 하나 없다. 누구의 표현 따라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선상에서 의자 위치나 바꿔보는 한가한 허튼소리들뿐이다.

아닌 말로 어른들도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세상이다. 삶터에서 왕따당하고 일진들이 고용한 용역깡패들에게 폭행당한 서울 용산의 철거민들은 망루로 쫓겨 올라갔다가 불에 태워져 죽었고, 일터에서 왕따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 1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일곱 번째로 희생된 한 젊은 노동자의 휴대전화에는 홀어머니 외에 모든 이들의 전화번호가 지워져 있었다. 비정규 인생 900만 명 시대, 이런 생존에 대한 공포가 어른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다. 고립과 소외의 문화가 판박이되고 있다. 파괴당한 인성과 그 폭력성이 복제되고 있다. 어떤 실력으로든 타인을, 동료를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타인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자본의 폭력 문화가 어린이들의 세계마저 식민화하고 있다.

자본의 도가니부터 깨부숴야

그런 아버지들의 일상적 문화를 고치지 않고, 어린이 세계만의 안녕이 따로 올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맑고 밝은 심성을 되돌려주려면, 우리 어른들조차 견디기 힘든 이 자본의 도가니부터 깨부숴야 한다. 누구도 승자일 수 없는 이 참혹한 시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나요. “불러봐도 대답 없는 그대.”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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