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선배가 내려왔다고 한다. 309일 만이라고 한다. 자신의 벗인 김주익이 끝내 살아 내려오지 못한 그 절망의 크레인을 자신만은 두 발로 걸어내려 가보겠다고 했던 사람. 내려가는 법을 까먹을까봐 날마다 계단 내려오는 법을 연습한다던 사람, 쇠파이프와 볼트 한 자루를 꼭 껴안고 잔다던 사람, 크레인 위에서 치커리와 상추를 키워 먹던 사람, 바나나가 곤봉이 되고, 사과가 사과탄이 될 정도로 추운 겨울부터 다시 지금 겨울 초입까지를 혼자서 버텼던 사람, 몇 번은 뛰어내리겠다고 난간 위로도 올라간 사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열다섯 살에 가출해 신문 배달, 봉제 보조, 시내버스 안내양을 거쳐 한진중공업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 된 사람, 스물여섯 살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3번 다녀오고, 감옥 2번 살고, 5년 수배생활을 하다 보니 머리 희끗한 쉰셋의 나이가 되어 있더라는 사람. 한국 근현대사 노동자·민중의 수난사를 자신의 온몸에 빈틈없이 새겨넣은 사람. 절망의 크레인 위에서도 이 평지의 누구보다 밝고 활달하고 유머러스했던 사람.
그를 구하자고, 아니 생의 난간에 서 있는 우리 운명을 구하자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를 타고 떠났던 지난 반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110여 명이 연행됐고, 200여 명이 소환 조사 중이고, 또 200여 명이 수사 대상이다. 폭염과 폭우와 여름휴가철을 넘겨야 했고, 6·27 노사 야합과 보수 언론의 총공세, 그리고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직적 반발을 넘어야 했다. 부산 영도는 매번 재벌들의 사병이 된 100여 개 중대에 의해 원천봉쇄돼 무슨 봉건영주의 사유지처럼 갈 수 없는 섬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 수많은 난관을 넘어 오늘 그가 내려왔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 조금 안전한 곳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 더 이상 김진숙이 아니다. 그 아래에서 이름 없이 벗을 함께 지키던 박성호와 박영제와 정홍형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함께하며 받았던 가슴 아픈 질문 중 하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수천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한진이 세운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에서 일하는 2만2천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들 정리해고자가 정규직일 때, 힘있는 노조를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해왔는가라는 뼈아픈 질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한진으로 향하는 희망의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김진숙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 오늘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지금도 처음의 김진숙이 그랬듯 고립된 채로 싸우고 있는 재능교육 특수고용 노동자들이고, 5년째 투쟁 중인 콜트·콜텍의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이고, 다시 잘려나가고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고, 한진 교섭이 급물살을 탈 때 다시 열여덟 번째 희생자가 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이고, 그들보다 잘 안 알려진 채 싸우는 무수한 이 땅 민중의 고단한 얼굴이다. 그리고 실제 그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김진숙과 이 희망의 버스를 지켜왔다. 그런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얼굴을, 이 시대의 어둠을 생각해보는, 그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내려오게 한 순박한 노고
실시간으로 뜨는 기사를 보니, 여러 국회의원과 유명인이 실제 한진 문제 해결의 주역인 것처럼 회자된다. 참 유머러스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보다 이 과정에서 열심히 했던 한 친구는 “마음이 울적한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아마 이제 다시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을 아프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김진숙이 내려오기까지 지난 봄·여름·가을 어떤 이들의 순박한 노고가 있었는지, 어떤 뜨거운 눈물의 바다가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마음들이 다시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제 다시는 누구라도 혼자 외로운 고공으로 오르지 않아도 되게 만인의 연대가 굳건한 그런 세상이 그립다. ‘희망의 버스’ 시즌2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1편보다 더 아름다운 2편이 나오리라.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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