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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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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는 싸우고 있다

등록 2011-09-08 09:37 수정 2020-05-02 19:26

가까이 있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많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까이 없어도 알게 되는 일과 가까이 없으면 모르는 일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그 경계 바깥을 떠도는 사람들을 ‘소수자’라고 부른다. 그 ‘수’는 결코 소수가 아닐 것이나, 그들을 위한 자리는 야박하게 좁다. 대개의 경우 그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소수자의 몫이다.

입국 거부당한 감염인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지난 8월26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ICAAP)는 그런 자리였다. ICAAP는 ‘세계에이즈대회’를 제외하면 가장 큰 규모의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관련 포럼이다. 제10회 ICAAP를 한국에서 열려는 준비는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이때 한국의 에이즈인권운동가들은 조금 난감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한국 조직위원회는 에이즈 문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한국 정부는 이런 대회의 개최를 영광으로 여기기는커녕 만류했다. 이렇게 알맹이 없이 준비되는 대회라면 차라리 보이콧해야 하는 건 아닌가, 민간 부문의 대회를 따로 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고민들이 오갔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민간 부문에서 대회를 조직하는 데 손을 보태지 않으면 대회 성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보건복지부는 대회를 6개월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대회를 연기하라고 했다. 행정적 지원도 재정적 후원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뒤편에서 들리는 말로는, 부산 시내에 감염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걱정한다고도 했다. 외국의 감염인과 활동가, 의료인들이 이미 참가 준비를 시작한 시점에서, 무책임하게 연기 운운하는 상황을 전혀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 자리는 어차피 소수자들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여전히 에이즈에 대한 관심이 적고 잘못된 정보와 편견이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 국제대회를 빌려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야 했다. 이야깃거리는 차고 넘쳤다. 에이즈라는 질병과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의학 연구의 성과도 나눠야 했다. 그리고 질병이 찾아드는 불평등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야 했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성매매 여성, 가난한 사람들, 여성과 어린이, 그들을 낙인찍으며 에이즈에 취약하게 하는 차별의 제도와 관행을 살피고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야 했다. 치료제가 개발돼도 가난한 감염인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특허제도와 그걸 강화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성토해야 했다.

이렇게 ICAAP가 열렸다. 5일간의 공식 일정을 앞두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을 찾아온 활동가들과 커뮤니티 포럼도 열었다. 입국 심사 과정에서 ‘성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트렌스젠더 활동가도 있고, 아예 비자를 거부당해 입국하지 못한 활동가도 있었다. 그렇게 모인 많은 나라의 활동가들과 각국의 에이즈 인권 현실과 저항의 소식을 나누며 연대감을 다졌다. 개막식에는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왔다. 생색내려고 왔는지, 마지못해 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활동가들의 항의는 받아 마땅했다. 8월27일에는 대회장 안에서 함께 행진을 하기로 했다. 유엔에이즈는 2010년 신규 감염, 에이즈 관련 사망, 그리고 차별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활동가들은 ‘진짜 제로’를 위해 FTA를 중단하라고 외쳤다.

꺼내지도 못한 인권 이야기

그 요구들이 우리에게 전해지기 전, 경찰의 카메라에 저장됐다. 그리고 불법 채증에 항의하던 변호사가 연행됐다. 연행을 막으려고 호송차를 가로막은 활동가들이 다쳤다. ICAAP 조직위원회는 활동가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뒤늦게야 참가자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이것이 에이즈인권운동가들이 겨우 연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자리는 다시 닫혔다. 찰나처럼 스쳐간 시간, 나는 그 자리를 소개하느라 에이즈를 둘러싼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1년 같았을 친구들이 울고 웃으며 부대꼈을 시간에 박힌 마음들은, 아직 전하지도 못했다. 그게 ‘소수자’들의 자리다. 하지만 기꺼이 또 다른 자리를 열어낼 그들이 소수자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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