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야 할 날에도 김종대(66)씨는 마음이 바쁘다.
전북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문화유산해설사로 일하는 그에게, 방문객이 가장 많은 일요일은 휴일(休日)이 아닌 ‘일’하는 요일인 것이다. 그렇게 주말을 포함해 한 달에 10일가량을, 그는 전주와 문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홍보대사로 자처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 문화유산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1천 년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전주 교동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교동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향교, 한벽당 등 유산들이 즐비했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곳을 유산이 아닌 놀이터로 여겨왔다. 그중에서도 경기전은 그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 때인가 경기전 안에 위치한 전주사고(전국의 5대 사고 중 하나) 옆에서 고종의 황녀 이문용 여사를 마주한 것이다. 그녀는 그곳의 사당 한 칸을 빌려 남루한 행색으로 머물고 있었으나, 그 당당한 기세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수십 년이 지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와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란 걸 운명도 직감한 것일까.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문화와 역사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년 시절에는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자고만 생각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취직시험을 보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었다. 여성스럽고 내조를 잘해주는 따뜻한 아내를 만나 아이도 넷을 낳았다. 가끔 ‘이것이 다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커가는 아이들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다른 길을 모색해볼 수는 없었다.
1998년, 쉰둘이 되어서야 그는 ‘30년 동안 가정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 남은 생은 나를 위해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고심 끝에 그는 사표를 제출했다.
쉰둘. 얼마의 퇴직금만을 손에 들고 다시 시작하게 된 제2의 인생이었다.
막상 그 길 앞에 서고 보니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답을 얻으려고 여행을 시작한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속상해하던 아내와 함께였다.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았다. 어디로든 떠나 이제까지 살아온 궤도만이 정상인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이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주는 샘물”이라고 했던가. 여행은 그에게 새로운 열정을 품게 해주었다.
자원봉사가 바로 그것. 노인·장애인 시설에서 어르신들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렸다. 때로는 전주시에서 열리는 행사나 축제에 일손이 부족하면 달려가 주차봉사도 하고 안내봉사도 했다. 이상하게도 전에 없이 신이 나고 하루가 즐거웠다.
그러나 사람들의 걱정처럼 경제적 활동에는 욕심이 들지 않았다. 더 많은 돈이나 더 풍요로운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면, ‘부족함이 있다 해도 지금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평소 검소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다니던 중 2002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월드컵경기장이 만들어진 전주에도 외국인과 타지의 관광객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전주를 안내하고 봉사할 사람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이 전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그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주의 문화와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천혜의 기회. 그런 때 전주 시민들이 모두 안내자가 되고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전주시에서 시행하는 문화관광 안내 교육을 수료하고 그 뒤에도 교육생 동기들과 스터디와 심화과정 교육을 거듭하며 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소양을 쌓아갔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전주시문화관광해설사’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가 시작한 일은, 카페를 통해 전주의 문화와 유적지 등을 홍보하고 예약을 받아, 회원들이 돌아가며 문화해설을 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순수한 봉사로서의 일이었다. 30명쯤이 함께한 모임에서 그는 회장으로 활동하며 봉사자로서의 동기를 부여하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덩그러니 표지판만 서 있기 일쑤인 유적지에서 역사와 사람 이야기가 어우러진 문화해설은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때마침 전주를 관광도시로 육성하려는 전주시 관계자들에게도 관심을 받았다.
좀더 체계적인 조직 운영과 문화해설 활성화를 위해, 그는 전주시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전주시의 정책과 함께하는 대신, 순수한 봉사로 금전적 손해를 감수했던 회원들에게 교통비 등 실비 보전을 해주게 됐다.
그렇게 되자, 소박하게 시작되었던 일은 더욱 세밀해지고 구체화되었다. 전주시의 시티투어 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전국에서 오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전주 곳곳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것이 ‘전주의 얼굴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관광객에게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알리고 따뜻한 정서를 전할 수 있는 대변자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와 동료들은 문화 연구와 더 나은 해설 방식에 대한 토의에 게으르지 않았고, 더우나 추우나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와 동료들에게 감명해, 손에 들고 있던 제 고장의 특산품을 건네주고 도망가거나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황송할 만큼 고개를 숙이던 어르신, 추운 겨울날 고생한다며 내복 두 벌을 사서 보내준 이들까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보람된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기쁠 때는, 자신의 설명에 귀기울이며 역사적 사실에 감복하는 이들을 대하거나 연필로 꾹꾹 눌러 받아적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또 하나의 문화해설사요 우리의 위대한 역사의 전도자가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 1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그의 나이 66살. 그는 2년 전부터 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예전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많은 일을 겪었다. 지금도 이끌고 있는 가족 봉사단체 활동부터 문화해설사, 여타 전주시 문화알림이로서의 개인적인 홍보활동(그가 만든 인터넷 카페가 7개나 된다)까지. 오히려 그 전 30여 년의 생활은 기억에도 별반 남아 있지 않으니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열정적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그 열정의 에너지는 소진되지 않았다.
숲 해설가 교육과정을 마친 뒤, 전주 모악산·건지산 등에서 숲 해설가로서도 활동하며 평생교육원에서 컴퓨터 강사(그는 자격증이 무려 7개나 된다)로 일하는가 하면, 공무원교육원에서 문화 강의를 하는 등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하는 그다.
와글와글, 가족들이 모여드는 박물관의 일요일은 분주하다. 그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유물들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터넷 정보화 시대에,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두들기면 그보다 해박한 정보가 어찌 쏟아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욱 즐겨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말(言)이기 때문이다. 방문객에게 그의 존재가 고마운 이유다.
아직도 그는 그저 개인적인 일로 방문하거나 지나치는 유적지들에서 관광객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곳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에게 구수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풀어놓는 그는, 어쩌면 오랫동안 예비된 문화전도사가 아니었을까.
이제 내년이면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조직화·체계화된 뒤, 원활한 회원 관리를 위해 정년 제도를 정해둔 까닭이었다. 몹시 아쉽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뜻깊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다고 생각하는 그다.
그는 지난 13년간 그래왔듯, 계속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가고, 숲 해설가로서 그리고 문화유산해설사로서의 경험과 느낌 등을 담은 카페를 통해 문화와 역사의 알림이로서 활동을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그것은 어떤 보상이나 명성을 위함이 아닌, ‘그저 좋기 때문에’ 하는 순수한 열정이다. 언젠가 자신을 따라 처음으로 노인시설에 봉사를 갔던 젊은이가 한 말을 기억한다. “어쩐지 가슴이 뜨거웠어요”라던.
처음 직장을 그만둘 때는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이 어떤 빛깔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바로 그 가슴의 빛, 붉고도 붉은 따뜻함 그 자체의 색깔이라는 것을.
<font size="3"><font color="#006699">짜릿한 보람과 삶의 기쁨</font></font>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도 시간, 느린 것도 시간이라고 했다. 그에게 첫 번째 30년의 생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지만, 두 번째 13년의 생은 하루하루의 냄새와 질감마저 모두 떠오를 만큼 구체적이고 느린 것이었다. 안정된 생활과 재물, 순탄한 생을 조금 일찍 포기한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짜릿한 보람과 후회 없는 삶의 기쁨이다.
어쩌면 역사의 자취가 묻어나는 길들 위에서 오히려 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 아닐까. 따가운 매미 소리를 뚫고 바람이 불어오자 그의 얼굴에 맺혀 있던 땀이 시원하게 씻겨나갔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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