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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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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방울의 용기

등록 2011-03-18 06:10 수정 2020-05-02 19:26

사건은 장자연의 편지가 친필인지 아닌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몰려가고 있다.
국과수가 그 편지는 장자연 친필이 아니었다고 발표하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소란은 정신이상자의 자작극에 불과했다고 말하며 사건을 덮을 기세다. 그렇다면 는 너무 서둘러서 “장자연이 자필 편지에 ‘조선일보 사장’이라 기록한 것은 자신에게 성상납을 강요한 연예기획사 대표 김종승이 평소 전 사장을 ‘조선일보 사장’으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친히 그들의 지면을 통해 너무 자세히 해명한 셈이 된다.
 
공개돼야 할 또 하나의 리스트
마치, 최고은의 사인이 실제로는 아사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이었다고, 김영하가 항변하고 나선 때와 흡사한 상황이다. 그녀가 굶어 죽은 것만은 아니라 한들, 재능 있는 시나리오작가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그녀였으나, 며칠째 먹지 못할 만큼 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그러한 절망적 상황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 이 사회에서 예술가들은 철저하게 소모품처럼 쓰고 버려지며, 이후 그들의 생존은 각자 알아서 챙겨야만 하는 고통스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공중파 방송사가, 실명임을 확인한 장자연의 편지를 토대로, 세상이 다 아는 범인들을 고스란히 놔둔 채 종결한 수사를 다시 파헤쳤다. 며칠 지나 그 파장이 너무 커지자, 천안함이 북의 소행이었다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로 파란 사인펜 ‘1번’을 들이미는 실력으로, 국과수를 등장시켜 사건을 반전시키려 한다. 여기서 반전이 만들어진다 한들, 침실과 샤워실까지 제대로 갖춰진 접대실이 연예기획사 사무실 위층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출 도리가 없다. 장자연이라는 배우가 기획사 사장의 요구로 같잖은 권력을 손에 쥔 게걸스런 인간들을 위해 접대부로 활용되었고, 그러한 잔혹한 현실에 영혼을 유린당한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같은 절망적 상황에 신음하는 여배우가 장자연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2009년 장자연 사건 이후,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한예조)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인권 실태조사는 연예인 중 11.5%가 성상납, 20.7%가 접대를 강요받았으며, 이를 뿌리칠 경우 인격 모독이나 캐스팅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겪는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설문조사에서는 이들에게 접대나 성상납을 강요한 자들(기업인, 정치인, 언론인, PD 등)의 실명이 나왔지만, 한예조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부터 피해 당사자들까지 한결같이 그 이름을 알지만 공개는 하지 않는다. 왜?

 

그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장자연 이전에도 이후에도 같은 일은 반복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손을 치켜들어 말하지 않았다.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장자연은 죽음으로써, 그들을 고발한 것이다. 그녀의 편지가 친필이니 아니니를 따질 필요 없이, 2천여 명의 연기자 조합원을 가진 한예조가 그들을 괴롭혀온 한 줌의 권력자들을 공개하는 것으로, 우린 그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많은 여배우뿐 아니라, 배우의 꿈을 가진 많은 소녀들의 미래를 밝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 명단이 공개되고, 인터넷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31명의 명단과 대조해보면, 어디에 거짓이 있는지 명백해지고, 국과수의 결과와 무관하게 진실이 자명해질 터다.
단 한 방울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낼 수 없다면, 성적인 노예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

목수정 작가

*목수정 작가와 신윤동욱 기자의 ‘노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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