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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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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슬픈 인권

등록 2010-12-17 14:47 수정 2020-05-03 04:26

오늘(12월10일)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다. 그에 관한 얘기를 쓸까 했다. 그런데 인권단체들이 마침 이날 발표한 ‘2010년 10대 인권뉴스’의 1위가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 퇴진운동이란 소식을 들으며 머리가 묵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의 지혜를 모아 인권의 금빛 나침반을 탄생시킨 날을 기념한다는 게 부질없어 보였다. 입맛이 씁쓸했다.
이번호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쓸까도 생각했다. 2008년 ‘인권 OTL’로 시작해 2009년 ‘노동 OTL’로 한국기자상을 받은 OTL 시리즈가 의 탐사기획을 상징하게 됐고, 이제 또 하나의 OTL로 빈곤층과 죽음의 가슴 아프고도 사회구조적인 상관관계를 8주간에 걸쳐 탐색해보겠노라는 포부를 장광설로 풀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슬픈 생각이 들었다. 21세기 들어 국제사회의 인권 담론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는 빈곤과 건강권의 문제를 우리의 당면한 인권 과제로 받아들이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인권 현실은 너무나 퇴보해 있고, 이런 문제를 정책으로 뒷받침해야 할 정치권은 무식과 완력으로 멍들어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그래도 은 꿋꿋하게 OTL 시리즈에 박차를 가하리라는 다짐을 해둔다. 다만 조금 슬플 뿐이다.
12월7일 한나라당이 3년째 단독 처리한 2011년도 예산안에도 생각이 미쳤다. 아이들을 위한 무상급식 예산도 0원, 방학기간 결식아동 급식지원 예산도 0원인데,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지역구 관련 예산은 870억원이 증액됐고 이런 ‘형님 예산’이 지난 3년간 총 1조519억원에 이른다는 뉴스에 말 그대로 망연자실해졌다. 이러고도 당신이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나라의 어른이냐, 아니 그냥 생물학적 어른에 해당하기는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허망했다. 사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염치는 무엇이고, 아동 인권은 또 무엇이겠는가. 그저 측은할 뿐이다.
이성에 호소해도 감성에 호소해도 꿈쩍하지 않는 이 비루한 권력층과 그 하수인들이 마구 헤집어놓은 우리네 삶은 또 하나의 쓸쓸한 세밑을 향해 가고 있다. 문득 영혼이 너무 지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권이 내린 무서운 재앙 같다. 오래전에 읽은 시가 떠올랐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江에는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江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선 문득 暗號만 비쳐요. 읽어봐야 소용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不幸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곳곳에 쳐 있는 細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 -황동규, ‘초가’(楚歌) 전문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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