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사람은 세상을 바꾼다. 어떤 이들은 가면을 쓰고 살지만, 도대체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굳이 자신이 누구라 말하지 않아도 세상은 안다. 세상은 아니까 조롱한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기성의 코드에 너무도 맞지 않아서, “안녕하세요~” 인사만 해도 누군지 표시가 난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말이다. 고 앙드레 김 ‘선생님’은 두꺼운 화장을 해도 가면을 쓰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 그와 같은 이들은 누군가를 대신해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온몸으로 말한다. 백번 찍어서, 백번 놀려서 넘어가지 않으면 세상은 마침내 존경한다. 그렇게 살아온 그에게 가수 신해철씨가 잊지 못할 조사를 남겼다. “앙드레 김은 개인의 외적 표현과 성적 취향 등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편협하고 잔인했던 시대를 살아가시면서도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펼친 거인이었다.” 그는 세상을 백만번 찍어서 넘어뜨렸다.
장미 왕관을 쓴 ‘남자’ 피겨 선수
앙드레 김은 어디에나 있다. 여기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다. 무심히 채널을 돌리다 보았다. 조니 위어. 26살의 미국 청년, 피겨 스케이팅 선수. 2010 밴쿠버 올림픽 남자 프리 경기가 끝나고 채점을 기다리는 그를 보다가 ‘허억’ 해버렸다. 필생의 무대에서 남들이야 뭐라든 그는 자신에게 장미 왕관을 씌워줬다. ‘청년’이라 했으니 ‘남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장미 꽃잎 하나에 스폰서 하나 떨어뜨리는 짓이란 걸 그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냐고? “그게 나니까”라고 조니는 답하지 않을까. 조니 위어의 아이스링크장 안팎의 생활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를 별다른 기대 없이 보다가, 이것은 청소년 교육용 교재로 써서 마땅하다, 확신해버렸다.
세상은 그렇게 튀는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는 질서를 흔드는 인간을 용서치 않는다. 근엄하신 미국피겨협회, 세계피겨협회가 이런 선수를 좋아할 리 있겠는가. 그가 시즌 내내 잘하다가도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삐끗’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협회는 미국 대표팀에서 조니를 제외한다. 아무리 앙 선생님의 드레스가 세상을 바꾸었다 하더라도, 피겨복에 치맛단을 달고 나오는 남자 선수를 세상은 곱게 보지 않는다. 협회는 대놓고 싫어하고, 기업도 좋아할 리 만무하다. 이것을 미국식 표현으로 ‘가족 친화적이지 않다’고 하나 보다.
조니가 싫어하는 선수는 이반 라이사첵. 김연아 선수와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딴 그 선수다. 동갑인 조니와 이반은 주니어 시절부터 미국 선수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성장했다. 조니가 순응자가 아니라면, 이반은 모범생에 가깝다. 남자다운 외모에 파워풀한 스케이팅. 세상이 남자선수에게 기대하는 바를 어김없이 충족한다. 그러나 순응하지 않는 조니는 어른이 될수록 고난에 처한다. 남자의 가면을 쓰지 않으니, 경기를 마쳐도 기대한 점수는 나오지 않는다. 성별 코드를 깨는 취향에, 우크라이나인 코치를 두고, 개전의 정조차 없으니, ‘미쿡’에서 삼진 아웃될 조건을 갖췄다. 조니는 그렇게 세상의 태클에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진다. 마치 빙판에서 점프하다 넘어지는 것처럼. 밴쿠버 올림픽 경기를 중계하는 퀘벡 해설자들은 방송에 대놓고 “조니의 성별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조니는 어느새 “피겨 선수로 할아버지 나이인” 20대 중반이 된다.
자기 자신인 이유로 위태로운 사람들패션 공부를 하자니 학비가 걱정이고, 커피를 나르자니 빙판에서 보낸 날들이 허무하다. 겨우 스물 몇 살에 은퇴를 고민하는 청년의 미래는 보랏빛이 아니다. 이렇게 외로워도 슬퍼도 조니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당당하게 걸어가고, 성소수자 단체 행사에도 참여한다. 그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안다. 굳이 자신이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인 이유만으로 위태로운 청년, 세상에 어디 조니뿐이랴.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을, 그래서 때로는 차별을 당하고 자주 조롱도 당하는 ‘조니 위어들을 부탁해’.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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