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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위신 따윈 필요 없어

등록 2010-08-31 17:06 수정 2020-05-03 04:26

오는 11월이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니, 우리는 명실상부한 선진국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느껴야겠다. ‘죄송 내각’ 논란이 시민들 가슴에 그어대는 자괴감은 그냥 성장통이라고 해둬야 할까. 그렇지 않다. 부쩍 커버린 대한민국의 몸피에 걸맞지 않게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GDP를 대면하노라면, 자리에 값하지 않는 인격과 능력으로 어떻게든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는 각종 후보자들이나 그 후보자들이 경영하고자 하는 이 나라나 똑같은 모양새란 생각이 든다. 도도한 국제적 흐름이나 국제사회의 상식에 무감한 채 세계를 움직이는 서클에서 한자리 차지하려는 모양새 또한 그렇다.
우선 이번호 표지이야기와 관련한 이야기다. 전통적으로 인권 논의는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부당한 행위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거대기업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고용 관계와 상품 거래, 정부 정책에 대한 로비 등을 통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고, 이로 인한 개인의 권리 침해 문제가 부상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일찍이 1970년대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사회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규범화하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이라고 하면 수단을 불문하고 일단 성공하고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찌들었던 우리 사회에서도 뒤늦게나마 얼마 전부터 사회책임경영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됐다.
하지만 미담으로 회자되는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은 뭔가 ‘베푸는’ 인상이 짙었다. 이와 비교되게 최근 국제사회의 대세는 인권경영이다. 기업이 여력이 있으면 사회공헌을 하는 게 아니라, 기업 활동 전반에서 인권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다. 국내 최고의 기업이라는 삼성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잇따라 백혈병으로 숨진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이에 대해 세계적인 기관투자자들이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처럼, 인권경영은 우리에게 아직 낯설다. 노르웨이의 인권학자 보르 안드레아센은 인권 원칙을 존중하라는 지침들이 “국제적 명성의 강화와 유지에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기업들의 관심사일 뿐,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그다지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적 위신 따위는 생각할 필요 없는 나라나 기업은 인권 따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어떤가.
다음은 최근 논란이 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학생 참여 정책 이야기다. ‘서울교육 학생참여위원회’를 만들어 교육정책에 대한 초·중·고 학생 대표들의 의견을 듣고 필요한 부분은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보수적인 교육계 인사들과 언론은 “학생들의 판단력 부족” “학생회의 정치화 우려” 등을 들어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19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돼 1990년 발효됐고 우리나라 또한 1991년 비준한 세계아동권리협약은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능력이 있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하여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시할 권리를 보장하며, 아동의 견해에 대하여는 아동의 연령과 성숙도에 따라 정당한 비중이 부여돼야 한다’(12조 1항)고 규정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린이·청소년의 최상의 이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정책 형성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수렴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모를까, ‘애들이 무슨!’식의 배척론부터 펴는 것은 국제사회의 흐름을 20년 세월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망발에 다름없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보수 교육단체나 보수 언론의 말을 듣고 있자면, 이렇듯 국제적 상식이나 원칙이 낯선 외계의 물건이 된다. 국제적 위신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만약에 세계정부 같은 게 있다면 국제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려는 대한민국을 청문회 자리에 불러 이런 문제들을 따져물을지 모른다. 그러면 대한민국 대표는 뻘쭘한 표정으로 “기억이 안 나서…”라든가 “겸손하지 못했다면 죄송…” 하면서 눙치면 될까.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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