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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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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블랙박스



기억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과거의 상처를 꼭꼭 감추고 사는 아이들…

당장엔 감당하기 힘들지만 비바람을 견딘 나무처럼 찬란하게 이겨내길
등록 2010-08-26 22:19 수정 2020-05-03 04:26
내 마음의 블랙박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내 마음의 블랙박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고통은 살아 존재하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필연적인 숙명이다. 고통은, 아픔 그 자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고통의 신비를 알기까지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플 때, 어린아이들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 고통을 감춰버린다. 아예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린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그 고통을 까맣게 잊는다. 정말 없었던 일이 된다. 신기하게.

그러나 그 상처는, 고통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서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워 숨을 쉴 수 없어서, 고통을 기억하면 죽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취한 몸부림으로 숨긴 것이다. 우리 아이들 가슴 깊은 곳에는 이런 고통의 블랙박스가 있다. 자신도 그 누구도 열지 못하게 꼭꼭 자물쇠로 잠가버린 아픔이 있다.

은경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계속되는 폭행에 못 이겨 은경이는 가출을 했다. 엄마는 은경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집을 떠났다. 은경이는 가출을 반복하며 시골 고향 바닥에서 한가락 하는 비행 청소년이 됐다. 술과 담배는 은경이에게 뗄 수 없는 기호식품이었다. 혼자는 외로웠는지 어린 동생까지 유혹의 세계에 끌어들여 함께 놀아났다. 이런 은경이의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소년상담 교사는 아이의 가능성이 안타까워 은경이를 설득했다. “너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너는 그 세계에 도전할 만한 힘이 있다”고. 놀 만큼 논 은경이는 그 설득을 받아들여 상경했다. 새롭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 센터 생활을 시작했다.

한번 독하게 마음먹은 은경이는 그 고삐를 절대 느슨하게 풀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결실은 눈에 띄었다. 한 방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무슨 시험이든 두 방이 필요 없이 통과해버렸다. 이제 은경이는 자신의 꿈인 물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10월부터 학원에 다닐 계획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은경이가 갑자기 울다가 웃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았다. 뭔가가 은경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은경이는 스스로 신경정신과 약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진단 결과 약을 복용해야 할 만큼 우울증이 심했다. 은경이가 약을 먹으려는 것은 자꾸만 고개를 들어올리려고 하는, 묻어둔 고통을 약의 힘으로 더 깊숙이 파묻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은경이는 시간 맞춰 열심히 약을 먹었다.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 대신에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눈빛과 멍한 얼굴로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을 자고 눈을 감고 걸었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낯선 여자가 전화를 걸어 은경이를 찾았다. 여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은경이를 ‘죽일 년’이라고 했다. 그 여자는 은경이가 예전에 알고 지냈던 술집 언니였다. 미성년자인 은경이는 그 언니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휴대전화를 개설하고 술집에 취직했던 것이다. 뭇 남성에게 술을 따르고 거센 희롱을 받았지만, 은경이는 쉽게 돈을 벌고 소비하는 생활을 뿌리치지 않았다. 은경이를 괴롭힌 고통은 자신의 과거였다. 그것을 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양심이 자신을 괴롭힌 것이다.

며칠 전 은경이가 약을 먹으면서 고백했다.

“수녀님, 제 얼굴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싶어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요. 제가 너무 싫어요.”

그러면서도 은경이는 자기 고통에 대해 절대 비밀이다. 털어놓지 않는다. 그런 은경이에게 고통을 함께 나누자고, 그래야 문제 해결이 된다고 설득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아이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침묵하는 사랑이 필요하다.

연희. 연희는 며칠 동안 계속 낯선 남자가 목을 죄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이의 내면을 알아보기 위해 꿈에 나타난 남자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연희는 남성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두 다리의 무성한 털까지. 연희의 상처를 짐작했다. 하지만 연희가 말하기 전까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 믿는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아이들이 안고 사는 고통의 블랙박스들.

“혜경아! 엄마에 대해 기억나니?” “아니요, 전혀 없어요. 슬픈 감정도 없어요.”

“어린 시절요? 생각이 안 나요.”

“가장 슬플 때가 언제였어?” “몰라요.”

몸짓 깊은 곳에 꽁꽁 묻고, 열지 않는 고통을 직면하기엔 너무 어린 꽃봉오리들이다.

여름 장맛비가 며칠째 계속 내리고 있다. 나무들이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자기 자리에서 아픔을 겪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분명 나무들은 더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 자신의 색깔을 더욱 선명히 드러낼 것이다.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린 뒤 더욱 견고해질 나무들의 당당함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 모습이길 꿈으로라도 꾸고 싶다.

김인숙 글라라 수녀·마자렐로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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