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우리는 시험장에 나설 아이들 한명 한명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간절한 기도를 바친 뒤, 뭉툭한 찹쌀떡을 포크로 찍어 아이들 입에 넣어주었다. 날이 밝으면 대망의 검정고시 시험일.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본격적인 고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마자렐로 센터에서나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예비수업이 약 일주일 동안 실시된다. 연필 깎는 연습, 책상에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기 위한 의자 덥히기 연습, 책장 넘기는 연습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식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에 우리는 또 한 번의 엄숙한 예식을 준비한다. 검정고시반 교실에 센터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수녀님들 모두가 모여 오른손을 가슴에 붙이고 국민의례와 10가지 ‘대선서’를 합창한다. 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업 시작 5분 전에 교실에 앉아 있는다. 2. 수업 시간 도중에 나가지 않는다. 3. 수업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한다. 4. 선생님을 존중한다. 5. 수업 시간에는 수업에 관련된 내용의 책 이외에는 다른 책을 꺼내놓지 않는다. 6. 선생님들께 말대답을 하지 않는다. 7. 수업 시간에 졸려도 눈을 부릅뜬다. 8.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 9. 오랜만에 하는 공부지만, 책과 친구가 된다. 10. 검정고시 수업 중간에 포기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센터 아이들의 인생 역사를 보자면 공부하고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지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는 식은 죽 먹기다.
시험을 앞두고 놀이공원에 가는 것 또한 중요한 행사다. 아이들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모의고사를 보는 것을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하면서도 신기해하고 뿌듯해한다. 그런데 시험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감이 사라진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에, 떨어지기 전에 먼저 포기하려는 유혹이 따른다. 스트레스가 산처럼 높아만 갈 즈음,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날리고 와야 한다.
검정고시 준비 기간은 한 달 정도다. 더 길면 의지가 약한 우리 아이들에겐 검정고시 지망 원서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실력 차에 따른 개인 지도도 한다. 지인, 친척, 살레시오 수녀원 내 살레시오 문화원, 예비수녀 지원소, 살레시오 강구관의 수녀들까지 동원해 맞춤형 개인 과외를 한다. 집중 기간에는 평소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눈에 띄는 것은 너도나도 안경을 맞춘다는 것이다. 코에 안경 하나씩 걸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앉아 있으면 마치 하버드대학 학생들만 모여사는 집 같다. 보름쯤 되면 줄줄이 체하고, 배 아프고, 머리 아픈 증세가 나타나 병원 가는 일로 대목을 이룬다.
이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검정고시 날에 이른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여 아이들을 시험장에 보내고, 우리는 일을 하면서 기도를 바친다. 시험이 끝난 오후, 아이들이 써온 답을 바탕으로 점수 통계를 냈다. 본선에 철저히 강한 우리 아이들은 이번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냈다. 합격한 아이도 떨어진 아이도 모두 고맙고 기특하기만 하다.
떨어진 세진이의 이유 있는 소감문을 소개한다.
“검정고시를 58점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정말 충격이었다. 하지만 덜컥 어떤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울 자격도 없다’는….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았다고 해서 울 자격이 없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나도 사람이고 인격을 가지고 있다.”
간신히 ‘합격 끄나풀’을 잡은 다분이. 이제는 자기를 ‘재판 때린’ 판사님한테까지도 감사하다는 소감을 들어보자.
“내가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를 쳤다는 게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분명 밖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테고, 나가서 검정고시를 했다면 절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주신 판사님, 수녀님, 친구들께 감사하다. 이제 검정고시가 끝났으니 몰랐던 공부를 조금씩 채울 차례인 것 같다. ‘후회하지 않고 지금부터’라고 선생님이 했던 말씀을 꼭 내 머리에 저장해둘 것이다. 이곳, 마자렐로가 아니었다면 분명 난 부족한 아이였겠지. 이제 긴장 풀고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야지.”
나도 할 말이 있다.
“아그들아,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인생은 계속 시작이야.”
교실 칠판에는 아이들이 커다랗게 쓴 글귀가 남아 있다.
“한 방에 인생 역전.”
나는 이 글귀를 지우고 이렇게 써주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김인숙 글라라 수녀·마자렐로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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