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통해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이 뉴욕에 계신 어머니 곁에서 휴식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밤, 그날도 나는 오늘처럼 인터넷을 통해 그가 감금·폭행·갈취를 3년 동안이나 당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가슴 언저리가 미어지듯 아팠다. 분노의 통증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장애 아이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그는 오직 연주밖에 몰랐다. 그에게 돌을 던진 이에 대한 내 분노의 원인은 그를 ‘시피(쉽게) 봤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지켜주던 든든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몸이 불편한데다 멀리 떨어져 있는 틈을 타 그를 시피 보고 이용했다고 생각하니 사람이 무섭고 산다는 게 서글펐다. 만약 부모의 울타리가 예전처럼 튼튼했다면 그를 괴롭힌 이들이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10대 소녀들인 우리 마자렐로 센터 아이들은 화장을 한다. 민얼굴로 외출하면 죽는 줄 안다. 손톱·발톱에 색깔 있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낯에는 볼터치를 하면서 서로 화장을 도와준다.
“화장하지 마. 안 한 얼굴이 훨씬 이뻐. 정말이야.”
그렇게 말려도 소용이 없다. 그때마다 나는 우울해진다. 왜 그럴까? 행여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거리의 소녀’로 여겨 시피 취급하고 건드릴까봐서다. 그래서 어느 때는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 그런 어른들이 상상이 돼서.
얼마 전, 센터에서 새로운 기사 한 분을 채용했다. 원장 수녀가 그분께 우리 집 현황을 두루 알려주면서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강조한 것은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든 아이들을 존중해달라는 것이었다. 부모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혹시라도 말이나 행동을 쉽게 할까봐 미리 보호막을 친 것이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할지언정 은연중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면 더는 우리 집 사람이 될 수 없다.
센터의 한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벌을 줄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존칭어를 쓴다. 어느 날 혜경이가 물었다.
“수녀님, 있잖아요. 제가 가출하고 돌아와 야단맞을 때 왜 갑자기 저한테 말을 올려요? 거리감 느껴지게?”
나는 혜경이에게 말했다.
“혜경아, 생각해봐. 네가 야단을 맞을 때 수녀님이 ‘야, 너 왜 그래. 똑바로 하란 말이야, 알았어?’ 하면 기분이 어떨까? 존칭어를 쓰는 건, 야단은 치지만 널 무시하지 않는다는 표시야.”
혜경이도 이해가 간다는 눈치였다.
어느 신문 사설의 내용이다. 가출 소녀들이 “저 집 나왔어요” 이 한마디를 인터넷에 띄우는 순간 남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단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출애굽기 22:21)고 신신당부하셨다. 남편의 보호가 없는 여인과 부모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을 건드리려는 인간의 검은 본능을 그는 너무나 잘 아신 것이다.
오로지 바이올린 연주가 세상사는 법이었던 청년 유진 박이 죽을 만큼 맞으며 온갖 행사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동료 수녀에게 이를 알리며 흥분했다. 그와 친분이 없는 한 수녀의 마음이 이런데 그를 애지중지 키운 어미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고. 이렇게 열을 올리자 동료 수녀도 “맞아요. 맞아요” 맞장구를 치며 아파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런데 수녀님, 수녀님은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정말 춘향이 같은 모습인데…. 오늘 같은 때 보면 갑자기 월매, 월매로 변해요.”
세상살이 고통 가운데 사람이 주는 아픔이 가장 크다. 그럼에도 사람만이 희망인 것도 사실이다. 유진 박을 다시 살린 이들 또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픈 소식을 전해듣고 커뮤니티를 만들고 온라인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그가 다시 돌아온 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람들의 응원 때문이라 한다. 기쁘다.
오늘도 가난한 청소년을 아프게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보호하려는 따뜻한 분이 여전히 계시다. 그들과 더불어 나 또한 센터 아이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 위해서라면 죄를 짓지 않는 한 월매든 춘향이든 마다하지 않겠다.
김인숙 글라라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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