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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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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의 복수

등록 2010-08-03 20:59 수정 2020-05-03 04:26

그것은 어긋난 ‘사랑’이었을까.
결혼 승낙을 해주지 않는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한 한 청년의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혹자는 이 사건을 두고 청년의 어긋난 사랑의 방식을, 또는 사랑의 무서움을 이야기했다.
관련 기사를 보면, 연인 사이는 여자 쪽 부모의 반대로 이미 5개월 전부터 소원해져 있었다. 대개 남녀 사이는 옆에서 말리면 더 뜨거워지는 법인데, 이들 경우는 부모의 반대가 오히려 거리를 두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모양인지.
폭력의 주요 원인은 모멸감

수컷들의 복수.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수컷들의 복수.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연유야 어찌되었건, 사랑은 이미 금이 갔는데 청년은 어쩌자고 폭력까지 동원해 결혼 승낙을 받고 싶어했을까. 21세기에도 여전히 결혼은 부모님이 승낙해주면 성사되고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부모님이 마지못해서라도 승낙하면 여자친구의 마음 정도는 들고 내빼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건지, 새삼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표면적 동기의 애틋함과는 달리, 결국 피를 부르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이 사건을 촉발한 것은 결혼을 향한 강렬한 의지가 아니라, 여자친구 부모에게 상처 입은 청년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미국 하버드대 폭력연구센터 소장 길리언 박사는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왜 타인을 공격했는지 물었을 때, 언제나 “나를 무시했기 때문”이거나 “내가 찾아가는 것을 멸시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멸시’는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단어다. 지금까지 본 심각한 폭력 행위 중에서 모욕감·굴욕감·경멸감에서 출발하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길리언 박사는 말한다. 결국 모든 폭력 행위는 자존심의 손상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결혼 승낙’은 짓밟힌 자존심을 내건 필사의 항전에서 깜빡이는 전광판 노릇을 했을 뿐이다.

근간 우리는 불감증에 걸릴 지경으로, 연이은 어린 여아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접해왔다. 한국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을 듯 벌어지기만 하는 계층 간 격차는, 그 현기증 나는 계단의 가장 아래쪽에 박힌 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모멸감을 떠안긴다. 그들에게 다가온 굴욕감은 자신보다 더 약한 상대에 대한 잔인한 공격으로 튀어나오고. 어린 여아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것은 가장 비열하면서도, 그들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세상을 향한 보복인 것이다.

청년의 극단적 행위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여자친구의 부모를 향한, 자기파괴의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는 과도한 자기방어였다. 청년은 경찰과 대치하는 와중에 여자친구에게 밥상을 차려줄 것을 종용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내 삼고 싶었던 여자로부터 남자로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범행의 직접적 계기가 살짝 엿보이는 이 대목에서, 별 볼일 없는 수컷이 연약한 여자 위에서나마 군림해보고 싶어했던 옹졸한 지배 근성도 같이 초라하게 드러난다.

남성은 불평등을 견디지 못한다

인간의 고갱이 속에는 누구에게나 고결하고 선한 마음이 있으련만. 사람이 사람 위에 겹겹이 올라서고, 짓밟고 짓눌리는 정글로 세상이 돌변하면서 모멸감은 전염병처럼 도시 전체를 배회한다. 특히 남성은 이 불평등을 더 견디지 못한다. 사회 전체의 불평등이 조금만 개선되어도 남자들의 평균수명은 눈에 띄게 상승한다는 조사결과가 이 허세만 가득할 뿐 허약하기만 한 생명력을 가진 수컷들의 생리를 드러내준다. 우울증으로 잠복하든, 추악한 범행으로 세상을 위협하든, 이 청년처럼 사랑을 뒤집어쓰고 징그러운 협박범으로 둔갑하든, 그들은 자신을 다 소진하고 나서야 괴물이 되어버린 몰골로 세상에(혹은 저 세상에) 투항한다.

경찰은 투항한 자를 감옥에 가둬들인다. 그리고 세상은 또 열심히 모멸감의 그물을 친다.

목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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