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블로거21] 독재 버스

등록 2010-07-27 21:33 수정 2020-05-03 04:26
[블로거21] 독재 버스

[블로거21] 독재 버스

버스보다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출퇴근 교통수단으로서 최적화된 이동 거리를 가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동 시간이 예측 가능하다는 이유도 꽤 크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상황이거나 변함없는 패턴이 싫어지는 경우 버스를 이용한다. 물론 이는 목적지가 동일한 출퇴근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그 효용성의 편차가 분명한 경우에는 선택이란 의미가 사라진다. 버스거나 지하철이거나….

버스는 재미있는 교통수단이다. 다중이 함께 움직이는 탈것이면서도 택시처럼 운전하는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움직이고자 하는 목적지를 결정하고 버스의 번호를 ‘선택’한다. 얼핏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선택이란 지극히 한정돼 있고 상당히 일방적이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혹 그렇지 않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xx번의 버스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버스가 도착하고 그에 올라 지갑 속의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어떤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버스는 신형일 수도 구형일 수도 있다. 시간에 따라 사람이 무척 많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기도 버거울 수 있지만 반대로 꽤 널널해서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을 수도 있다. 요즘같이 더운 날 에어컨을 틀지 않는 버스는 없겠으나, 날씨가 어정쩡한 상황, 즉 사람에 따라 온도의 감이 다른 그런 날, 에어컨은 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켜져 있기도 또 꺼져 있기도 한다.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다. 여기에서 가장 큰 권력은 운전기사에 오롯이 쏠려 있을 뿐이다. 물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입장이므로 그는 우리의 어떤 요구에 반응한다. 그러나 반응의 정도는 그 사람이 어떤 품성을 지녔느냐와 또 밀접하게 연관됐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또 인상적인 것은 라디오다. 버스에서는 라디오를 틀어야 한다는 법이 따로 있지 않을 텐데 많은 버스 기사들은 늘 라디오를 틀어댄다. 라디오 소리가 싫은 것은 아니나 그 상황은 지극히 일방적인 느낌이 든다. 운전자 한 사람에 의지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모든 사람은 운전자의 기호가 상당히 개입된 라디오 방송만을 들어야 한다. 대부분 운전의 무료함과 힘듦을 달래기 위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의도되진 않았겠으나 독재의 알레고리가 느껴져 잠깐 소름을 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가령 항의하는 승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송만 틀고 심지어 정해진 노선조차 벗어나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는 운전기사가 있다면….

음… 있는 것도 같다.

장광석 디자인주·디자인실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