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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근육질의 시대

등록 2010-04-14 13:37 수정 2020-05-03 04:26

에 이어 또 다른 드라마가 종영했다. 다. 전파를 타는 내내 독특한 소재 때문에 각광받았다. 기존 사극과 달리 ‘밑바닥 인생’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호평 일색이었다. 기술적 진보도 괄목할 만했다. 전반부에서 보여준 촬영기법은 미국 드라마에 익숙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 인기는 시종일관 벗고 나대는 남성 배우들의 ‘초콜릿 복근’과 무관하지 않았다.

1980년대판 몸짱 영화의 귀환

추노, 근육질의 시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추노, 근육질의 시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많은 이가 의 내용에 주목하지만, 알고 보면 그 형식은 상당히 진부한 것이다. 마치 1980년대를 풍미했던 람보나 코난 시리즈 같은 할리우드판 ‘몸짱 영화들’이 귀환한 것 같았다. 존 트래볼타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를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차지했을 때, 더 이상 배우는 연기로 승부를 걸지 않았다.

이들은 제모제로 매끈하게 다듬은 몸을 카메라 앞에서 벗어젖히면 그만이었다. 바야흐로 당시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가 이끄는 ‘강인한 사나이들의 세계’가 영화에서 근육질 이미지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초콜릿 복근으로 무장한 를 보면서 80년대를 주름잡은 튼튼한 사나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 단순하게 80년대 근육질 영화의 아류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같은 근육이지만 의 것은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의 사나이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 카메라 기술과 ‘명품’ 몸매, 두 요소가 빚어내는 ‘사극’은 더 이상 역사에 대한 얘기이기를 그친다. 역사는 사라지고 거기에 남는 것은 오지호나 장혁이나 이다해일 뿐이다. 현실의 배우와 극중 인물은 아무런 괴리를 갖지 않는다. 역사적 개연성이나 세부묘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까닭이 이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우매해서 이런 유사 역사를 감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역사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즐겁다. 남들이 착한 일이라고 말하는 걸 실천으로 옮기면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착하다는 것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한때 유행한 “몸매가 착하다”는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섹시한 몸매’를 ‘착한 몸매’로 등치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문제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에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았다기보다, 지금 살아가는 현실을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 현실은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다. 의 근육이 80년대의 잔영이지만 다소 다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는 이상화한 근육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배우의 몸을 보았던 것이다. 이 몸에서 살아 뛰는 근육은 우리도 가질 수 있는 현실이다.

과거의 한국은 남의 고통에 눈물을 흘렸던 사회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은 자신의 우월성을 추구하는 시대다. 는 이런 한국 사회의 변화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 80년대 할리우드의 유행을 닮았다고 해서, 보수주의적 드라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화 형식은 현실을 지도처럼 비율에 맞춰 ‘반영’하는 것이지, 현실과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의 강박

80년대 할리우드의 람보나 코난 시리즈가 60년대 반문화 운동의 형식을 빌려와서 보수주의적 내용을 담아냈다면, 는 반대의 경우다. 80년대나 통했을 보수적 형식에 이명박 시대의 ‘계급투쟁’이 드라마에서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는, 특히 대중문화는 고정적이지 않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고, 이로 인해 동일한 형식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판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의 원리는 그냥 대중문화 영역에 그치는 것일까? 최근 불거지는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대응을 보고 있으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내용을 다시 반복시키려는 일부 보수 세력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새삼스럽게 의 종영이 아쉬울 지경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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