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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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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사회주의

등록 2010-03-23 16:55 수정 2020-05-03 04:26

3주 연속으로 아이들 이야기로 ‘만리재에서’를 쓴다.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철없는 어른들이 가난한 아이들을 상대로 작정하고 ‘집단 괴롭힘’을 가하는 듯하다.
여당 지도부와 기획재정부 장관이 나서 무상급식을 폄하하고 훼방 놓은 데 이어, 무상급식 실시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여온 단체에 선관위가 ‘선거법 위반’ 운운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이 지방선거의 쟁점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무상급식에 찬성·반대하는 홍보물을 배부하거나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것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될 것”이라는 논리라나. 이 단체가 지방선거를 겨냥해 새삼스럽게 그런 운동을 펴는 것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바다. 게다가 선거라는 것 자체가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공론화하고 이렇게 형성된 여론을 의석수에 반영하는 제도다. 선거 쟁점에 대해 입 다물라니, 그럼 정부·여당이 부랴부랴 무상급식·무상보육 관련 정책을 내놓는 행위는 또 뭐란 말인가. 선관위가 말하는 선거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부·여당은 맘껏 홍보를 하고 국민은 찍소리 하지 말고 듣기만 하다가 투표하라는 뜻인가.

이제 그만 좀 하자.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어린이·청소년은 인류 가운데 가장 취약한 소수자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장하느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스스로 이를 해결할 능력은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다. 보살핌과 지원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국가가 자신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해주도록 정치 행위를 통해 압력을 가할 수 없는 유일한 집단이다.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빈곤층 아이들은 더더욱 억울하다. 자신의 가난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 아이들이다. 부모가 가난할 뿐이다. 사실 ‘빈곤층 아이들’이라는 표현조차도 그들에게는 억울한 낙인이다. 왜 ‘빈곤층 급식’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냥 급식을 제공하면 된다.

전면 무상급식 주장에 대해 누군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이들의 먹는 문제에까지 색깔론을 덮어씌우려는 저열함을 비웃어주는 한편,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원칙, 즉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려면 부모의 처지와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평등한 출발점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 공부하고 자라는 문제에선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한 토대를 마련해주자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사회는 봉건·계급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어린이 사회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전제가 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얼마나 평등하게 잘 보살피는지가 그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아귀다툼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에게 눈 돌릴 틈이 없다. 정의와 박애의 정신이 시스템으로 녹아들어간 선진사회일수록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커진다.
우리가 그런 사회로 가는 데 뭔가 거대한 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지막 회에서 세경이가 한 대사처럼, 계급의 사다리를 딛고 올라갔을 때 아래쪽에 남아 있을 사람들을 한번 생각하는 마음이면 족하다. “신애가 가난해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면 족하다. 흘러간 팝송 한 곡을 눈 감고 들어보면 족하다.
‘또 하루가 갑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울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사랑을 당신 가슴에 담아요/ 증오가 자라나게 놔두지 않을 것임을/ 세상에 알리기 원한다면/ 조그마한 사랑을 당신 가슴에 담아요/ 그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겁니다/ 모든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겁니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재키 드섀넌 (Put a Little Love in Your Heart)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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