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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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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내세우던 검사님들 어디 가셨나


엘리트의식·권위의식·사명감이 뒤섞인 ‘검사의 자존심’…
참여정부 때 발끈하다 MB 정권 들어 조용한 이유는 뭘까
등록 2010-01-15 13:22 수정 2020-05-03 04:25

“지금 나보고 사표 쓰라는 거요?”
전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2005년 10월12일 밤 9시. “6·25는 통일전쟁, 맥아더는 전쟁광”이라고 주장한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라”며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김종빈 검찰총장을 상대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그날, 사건의 ‘주연급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사퇴설을 확인하려 건 전화였다.

2005년 10월17일, 수사지휘권 행사를 둘러싼 파문으로 사표를 낸 김종빈 검찰총장(오른쪽)이 경기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찾아 천정배 법무부 장관(왼쪽)에게 퇴임 인사를 한 뒤 장관실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2005년 10월17일, 수사지휘권 행사를 둘러싼 파문으로 사표를 낸 김종빈 검찰총장(오른쪽)이 경기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찾아 천정배 법무부 장관(왼쪽)에게 퇴임 인사를 한 뒤 장관실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그런 건 아니고요. 사퇴설이 있어서 확인해보는 겁니다.”

“내가 솔직하게 얘기할까? 나는 이런 문제가 아니어도 언제라도 사표 낼 각오가 돼 있어요. 솔직하게 얘기해서 사의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이게 자리를 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당시 ‘검찰총장과의 동반 사퇴’ 위기에 처했던 그는 이후 대검 차장, 서울고검장 등 요직을 거쳐 지금은 이명박 정권의 권부 핵심으로 진입한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이다.

구체적 사건을 두고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가 이뤄진 건 1986년 검찰청법에 관련 조항이 제정된 뒤 처음이었다. 20년 만에 수사지휘권이 처음으로 ‘공식’ 행사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참여정부 이전 검찰은 정권에 철저하게 종속돼 있었다. 검찰 출신의 ‘대선배’가 법무부 장관이 돼 법무·검찰 ‘조직’을 이끌었다. ‘비공식’ 지휘가 횡행해도 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에 갈등이 불거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참여정부 들어 수사지휘권이 발동됐다는 건 검찰과 정권의 갈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검찰권을 정당하게 견제한다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강 교수의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놓고 40분간의 격론에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것으로 검찰총장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명분’을 잡고, 장관은 소신대로 불구속 수사를 관철하는 ‘실리’를 챙기는 윈윈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과 대검 등 엘리트 주류 검사들의 반발로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황당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부당한 수사 지휘는 수용할 수 없다. 수용하려면 검찰총장이라도 직을 내걸라”는 검사들의 반발 이면엔 그들의 자존심 문제가 숨어 있었다.

검사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고 인재라는 엘리트 의식과 사람을 잡아 가두고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의 달콤함, 그리고 ‘공익의 대변자’라는 사명감 같은 게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이 대한민국 검사의 자존심이다. 수사지휘권이 발동된 직후 공안통 중견 간부는 “검사들은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데, 이렇게 되면 자부심에 상처가 생긴다”며 파문을 예견했다.

그런 검찰에 참여정부 5년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는’ 시간이었다. 검찰은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된 노무현 대통령과 호기롭게 맞장을 떴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검사스럽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많은 검사들이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반감이 더욱 커졌다고 입을 모은다. 그 뒤 검찰은 명예회복을 노리며 절치부심했다. 과거와 달리 검찰에 대한 정권의 은밀하고 부당한 압력이 없어진 틈을 타 대선자금 수사로 대반전을 일궈냈다. 묵사발이 됐던 자존심을 회복한 것이다. 검찰은 그때부터 ‘독립성’과 ‘중립성’을 금과옥조처럼 부르짖기 시작했다. 조직 자체의 자존심이 더 강해진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례 없이 공개적으로 이뤄진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가 검찰로선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봤자 행정부에 종속된 법무부 소속 외청 공무원’이라는 검사의 한계를 일깨워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주·증거인멸의 우려도 없고 현존하는 해악을 끼칠 리도 없는 강 교수를 굳이 구속하려 들던 그들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검찰 수사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려 한 순수성만큼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검찰은 다시 조용해졌다. 미네르바,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문화방송 , 용산 참사,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사건 등 정권의 ‘청부’ 의혹이 짙은 수사가 차고 넘치지만 “자존심 상한다”며 반발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수사를 거부하며 옷을 벗은 임수빈 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가 아직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요즘은 검사들이 자존심을 많이 접고 사나 보다.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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