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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재판부가 면죄부 주기에 급급했던 삼성 재판…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우리 법조의 현실
등록 2010-06-11 15:33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5월29일 대법원은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의 피고인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해 5월29일 대법원은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의 피고인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1980년대 후반 유학을 나갔는데 외국 사람들이 삼성을 알고 있더라고.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프리카 토고 정도로 대접받는 시기였는데 말이지. 그런 삼성을 인정해야 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을 두고 얘기하다가 결국 ‘글로벌 기업 삼성’ 예찬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친 ‘잘나가는’ 판사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사건이 일어난) 1996년에는 이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며 “삼성은 법을 앞서가고 법은 그 뒤를 따라간다”고 했다. 삼성을 바라보는, 아니 삼성 비리를 대하는 이 사회 주류의 시각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당신처럼) 혈기 왕성한 시기가 있었다”며 “에버랜드 사건을 비판하려면 공부를 좀 하고 비판하라”고 훈계했다. 이때가 2006년 9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이혜광)가 이미 에버랜드 사건에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이 판사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공부도 않고 기사 쓴다”는 힐난을 들었지만, 사실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삼성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한 뒤 에버랜드 사건은 법조팀 기자들에게 ‘교양필수 과목’이었다. 재벌의 변칙적인 경영권 승계를 단죄할 수 있는 중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1996년 10월 에버랜드가 CB를 헐값에 발행했는데, 주주 계열사들이 매입을 포기하고 대신 이건희 회장 아들 재용씨와 딸 부진·서현·윤형씨가 이를 사들였다. 에버랜드가 CB를 제값이 아닌 헐값에 이건희 회장 자녀들에게 넘겨 회사에 손실이 생겼으니 배임죄가 성립된다는 주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둔 2003년 12월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채동욱)는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과 박노빈 전 상무만 일단 기소했다. 삼성은 대법관 출신 이용훈 변호사(현 대법원장)와 법무법인 김앤장에 사건을 맡겨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공개적인 법리 논쟁이 벌어졌으니 추가 연구가 필요했다. 법조팀 안에서 기자들끼리 관련 논문을 찾아 돌려보며 공부를 더 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가 쓴 를 읽었다. 이 책에서 김 변호사는, 2002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맡은 뒤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의 증거를 조작하고 검찰에서 거짓말하도록 모의조서 작업까지 진두지휘했다고 고백했다. 에버랜드 사건의 법리가 복잡하다느니 만만한 사건이 아니라느니 수많은 법조인이 ‘엄포’를 놓았지만, 사건의 실체는 조잡한 조작극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법리적으로’ 따지겠다며 죽자고 덤벼들었으니 허탈한 맘 가눌 길 없다.

더욱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5월 6 대 5 의견으로 에버랜드 사건을 무죄라고 판결했다.“기존 주주에게 전환사채를 배정하는 주주배정의 경우 저가 발행으로 인한 기존 주주 소유 주식의 가치 하락은 해당 주주의 손해일 뿐 회사의 손해가 아니므로 경영진에게 배임죄를 물을 수 없다”는 삼성의 주장을 양승태·김지형·박일환·차한성·양창수·신영철 대법관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특검 수사를 통해 기소된 이건희 회장이 1심에서 탈세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는데, 이후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의 배임죄가 추가된 뒤에도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김창석)는 집행유예 형량을 그대로 유지했다. ‘1+1=1’이라는 것이다. 유치원생만 돼도 “틀렸다”고 고개를 저을 수식이지만, 이건희 회장을 감옥에 보낼 수 없다는 이 사회 주류의 의지는 굳건했다.

에는 많은 법조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한 번쯤은 면식이 있는 사람들로, 대부분은 ‘푼돈’이나 접대에 양심을 판 부끄러운 얼굴이다. 호평을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 한 명을 최근 만났다. 그는“법이라는 게 말이야, 약한 자에게는 관대하고 강한 자에게는 엄격해야 하는데 지금은 거꾸로야”라며 한탄했다. 2010년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팀 dokbul@hani.co.kr

*‘서초동, 그 아찔한 기억’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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