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온 하늘과 땅을 얼어붙게 하고 머리가 띵해질 만큼의 혹한을 은근히 기대할 때가 있다. 그런 날마다 발동하는 기이한 식욕 때문이다. 식욕이 향하는 대상은 냉면이다. 단 여기서 냉면이라 함은 갈빗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새콤달콤 국물에 고무줄 면발을 말아 내는 공장제 냉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좀 심심하다 싶지만 머금을수록 입안에서 그 향이 묵직해지는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말한다.
“꼭 내라. 꼭 내야 한다”
10여 년 전 혹독했던 겨울의 어느 날,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연출자이던 나는 와들와들 떨면서 한 냉면집을 향해 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라리 월남 가서 스키를 팔라고 하지, 이 혹한에 냉면집을 촬영하자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뻗대었지만 방송은 내일인데 섭외된 집이 이곳뿐이라는 데야 재간이 없었다. 작가는 미안한 듯 덧붙였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랍니다.”
냉면집 마루에는 한 할머니가 단정히 앉아 계셨다. 이 냉면집을 창업한,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평안도 출신 고집쟁이 노인의 아내였다. 할머니는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본고장 냉면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냉면은 말입니다. 추운 겨울날 삿자리를 뜨끈뜨끈하게 해서리 아래는 뜨겁지만 위는 달달 떨면서 먹는 게 제격이야요. 이열치열이라 그래개지구서리 여름엔 더운 거 먹디 않아요? 겨울에 이가 시리게 멘발 툭툭 끊어 먹구서리 뜨뜻한 육수 한 모금 마시면 대동강물이 꽁꽁 언대두 입안은 살살 녹는다니까니.”
화제는 괄괄하기로 이름난 서북 사람 아니랄까봐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평생 자신의 기를 죽였던 남편으로 옮아갔다. “아주 장비같이 호통을 쳐댔디요. 육수 맛이 맘에 안 들문 내다버리기두 했어요. 아들 녀석이 맡아 한다고는 하는데, 길쎄요… 아직은 그 맛이 안 나요. 하하하.” 느릿느릿하지만 음절 하나 하나에 액센트가 붙는 평안도 사투리에 넋놓고 빠져드는데, 방송 용어로 “국어책 읽는 듯한” 서울 말씨가 분위기를 냉면 사리 자르듯 끊어놓았다. “내가 꼭 낼게. 그 맛 꼭 내고 말 거야.” 아버지 대신 주방을 맡은 아들이었다.
이런 어색한 대사는 편집 때 어김없이 잘려나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들의 다짐은 방송을 탔다. 아들의 말꼬리에 할머니의 대답이 바로 따라붙었던 것이다. “그래 ○○야. 꼭 내라. 그 맛 네레 꼭 책임지고 내라.” 어느새 할머니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곱씹었다. 되뇌었다. “꼭 내라. 꼭 내야 한다.” 할머니에게 냉면은 요리가 아니었다. 갈 수 없는 고향이었고, 돌아간 남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육수 젓는 아들에게 네가 꼭 아버지의 맛을 내야 한다고 울먹이던 할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그분뿐만이 아니다. 내가 단골로 삼았던 냉면집의 주인장 할아버지도 세상을 뜨셨고, 수십 년 타향살이 동안 파마 한 번 하지 않고 독하게 살면서도 “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사람이 지금이라고 없는 줄 아느냐?”고 진하게 배어나는 평안도 억양으로 되묻던, 그래서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밥을 더 먹이려고 애쓰던 평양 출신의 해장국집 할머니도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냉면 한 그릇에 고향을 띄우고, 그 맛을 내면서 옛 추억을 빚던 그분들이 끝내 고향에 발도 디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한 것은 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못난 탓일까?
하루가 무섭게 떠나는 분들그 겨울의 냉면집에서 만나뵈었던 할머니는 돌아올 봄에 금강산에 갈 거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셨지만, 그로부터 10년씩이나 지난 지금, 뱃길은 다시 얼어붙었고 풀릴 날은 아득하며 그 이유를 두고서는 지난 60년 세월 같은 핑퐁 게임이 지루하게 전개 중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기억해두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문이 열리고 벽이 뚫리는 호시절이 왔을 때, 손을 잡고 얼마나 반가우시냐고 여쭈어볼 분들은 하루가 무섭게 우리 곁을 떠나고 계시다는 것을.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다. 그런데 한국방송에서 이 60주년을 맞아 추억의 반공드라마 를 되살릴 계획이란다. 전쟁은 환갑을 맞이했지만 그 광기는 아직도 젊다.
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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