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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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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이별

등록 2009-12-23 17:53 수정 2020-05-03 04:25

일본에 ‘1세기 캘린더’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100년분, 3만6500여 일을 신문지 2배 크기에다 빽빽하게 인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발매 금지됐단다.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다 자살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1세기 캘린더’는 묘한 힘을 가졌는데, 그 무수한 날들을 보노라면 나도 저 가운데 하루 날 잡아 가겠구나, 내가 아는 인간들도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결국 인생은 저 종이 한 장의 가치도 없는 거구나, 뭐 그런 거대한 허무에 빠지게 된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그 심란함, 이해는 간다.

외면하게 되는 12월 달력

착한 이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착한 이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12월.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 시간이 느리게 가던 시절에는 이 마지막 장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너저분하게 적힌 송년회 스케줄을 보며 그러려니 한다. ‘1세기 캘린더’는 시간의 무한성 안에 사람을 불안하게 가두지만 12월의 달력은 오히려 반복되는 이벤트성으로 사람을 무덤덤하게 만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12월의 달력을 ‘1세기 캘린더’ 대하듯 일부러 외면하기 시작했다. 새해에 지나친 희망이나 절망을 갖지 않기 위해 지난날들에 일정한 거리 두기를 했던 것이다. 올해 역시 감정적 동요 없이 지나치려 했는데 아무래도 찜찜하다. 김형경의 애도 심리 에세이 을 읽은 탓이다.

은 이별과 상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부모, 형제, 연인, 고향, 이념 등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뒷받침해주던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당황하고 분노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고통을 느낀다. 무언가를 잘 떠나보내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심리적 덫에 반복적으로 걸리며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지 못한다. 대체 대상을 찾다가 성·알코올에 빠지기도 하고, 조증·울증을 넘어 자기 파괴의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애도’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애도’란 떠나보내는 슬픔을 소화해내는 것으로, 떠나간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며 눈물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하고 이를 인생의 통찰로 이어가는 작업이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애도의 5단계 이론으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제시하는데, 몇 단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별에 반응하는 모든 감정은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이며 충분히 슬퍼하고 느끼며 치유하자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여러 사례를 분석하면서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공동체의 내면 깊숙이 상실을 체험한 우리 사회의 분노를 걱정한다.

올해 우리는 뜨거웠던 공적인 애도의 시간과 함께 각자 삶에서도 이별의 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정치인을 잃었거나, 추억 속에서 빛나는 스타와 작별했거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떠나보냈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거나, 땀과 눈물을 바친 직장에서 해고됐거나, 공원을 만든다는 시당국에 의해 보금자리에서 쫓겨났거나… 또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꿈과 이별한 청춘도 있을 것이고, 그래도 놓고 싶지 않던 이 사회에 대한 낙관과 긍정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도 있을 것이다.

돌아보지 말고 그냥 잘 가라

정말이지 우리에게 슬퍼할 일이 넘쳐난 한 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앞으로도 계속 애도의 5단계 중 분노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 ‘1세기 캘린더’ 앞에서나 느낄 법한 허무와 패배감이 일상화되지나 않을지 방정맞은 걱정을 해본다.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급조한 애도의 의식을 가지기로 했다. 남은 한 해를 시원하게 떠나보내는 방법으로 마냥 순수하게 슬퍼하기로 한 것이다. 오랜만에 푸시킨의 전국 이발소 액자 전용시를 읊어보면서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라…. 제야의 종소리 울릴 때까지만이라도 슬퍼하고 노여워하라.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기억해야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지순한 슬픔 속에 2009년을 떠나보내고자 한다. 2009년이여, 제발 잘 가라,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라, 눈에 띄면 가만 안 둘 테니. 그렇게 모든 슬픔이여, 안녕!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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