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분노 뒤에

등록 2009-10-22 17:10 수정 2020-05-03 04:25

폭력 추방을 모토로 삼는 의 첫 회 아이템을 장식한 사람은 엄마를 때리는 패륜아였다. 엄마에게 ‘시옷자’ ‘지읒자’ 욕설을 퍼붓고 주먹질·발길질도 사양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의 격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징역 1년가량을 선고받았는데, 사람들은 그 형량이 터무니없다고 분통을 터뜨렸고, 후일담 방송에서 아들이 엄마에게 보낸 사죄 편지 가운데 출옥 뒤 장사 밑천을 대달라고 요구한 구절이 발견됐을 때에는 어떻게 그런 작자가 반성을 했답시고 방송에 소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게시판을 뒤덮었다.

분노 뒤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분노 뒤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패륜아를 다루지 않는 이유

나는 그 의로운 분노를 수긍한다. 병역 이행 기간보다도 짧은 징역 1년으로 어미를 쥐 잡듯이 잡은 죄악이 어찌 사해질 수 있으며, 그 죄에 값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4년이 흐른 요즘, 우리 팀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두들겨 패는” 케이스를 굳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진솔해지자면 시청자에게 더 이상 ‘쇼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상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무시로 만난다. 방송을 통해 소개하지 않은 케이스를 합하면 열 손가락을 서너 번 구부려야 셈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은 대개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혀서 쫓겨난 이들이기 일쑤였고, 그 성장 환경에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의 시커먼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덩치는 커져가지만 정신세계는 황폐해져갈 뿐인 아이들의 위안은 골방 속 컴퓨터였고, 가장 만만한 상대는 부모였다.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그나마 그들을 품고 있는 부모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와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스스로도 사회를 외면한 채, 사람 죽이고 피가 튀기는 폭력적 게임으로 밤을 지새우는 아이들이, 부모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심지어 장바닥에서 사온 병아리나 강아지의 목숨을 심심파적으로 거두던 아이들이 사회에 나올 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회적·제도적인 도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과거는 돌아볼 필요 없이,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준엄하게 꾸짖고 엄벌에 처하면 끝나는 것일까?

이른바 ‘나영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무슨 수를 쓰든 사적인 복수를 감행했을 것이다. 범인은 그의 행동을 통해 나영이를 한 인간으로, 인격체로,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으로 전혀 보지 않았음을 처절하게 증명했다. 이른바 ‘사이코패스’처럼 그는 어린아이의 육신과 정신을 장난감처럼 유린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부터 범죄 유전자를 지녔으며, 그런 이들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한다면 유사한 일이 줄어들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를 평생 연구해온 로버트 드 헤어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 경쟁만 강조하는 사회, 이기는 자만이 추앙받는 사회에서 사이코패스는 필연적이다.”

그 청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분노의 화살을 시위에 메기는 것은 좋다. 뻔뻔하고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의 심장에 과녁판을 그려놓고 그곳을 겨냥하는 것까지도 좋다. 그런데 과녁이 고슴도치가 된 뒤, 우리의 화살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진지하고도 실질적인 관심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분노는 급속히 그 영양가가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의롭고 마땅한 분노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4년 전, 어머니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폭행하던 스무 살 청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청년의 행동에 치를 떨던 사람들의 분노는 어디로 갔을까? 인두겁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짐승 같은 범죄자들을 대통령 말씀대로 “사회에서 격리”하면 분노의 근원 역시 우리로부터 분리될까? 우리가 할 일이란 우리의 분노를 고스란히 퍼부을 수 있는 괴물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뿐일까?

김형민 SBS PD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