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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평온한 광고를

등록 2009-07-02 08:28 수정 2020-05-02 19:25
부디 평온한 광고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부디 평온한 광고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프랑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많은 유학생들이 그렇듯이, 귀를 열어볼까 하고 오랜 시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곤 했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이미지들, 이를테면 중년의 여성이 매력적인 눈매로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이나 중동·아프리카의 낯선 풍경들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심심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 프랑스 텔레비전의 밋밋함에는 내 청취 능력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정규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의 사이 광고에 있었다. 상업광고가 대체로 단순하고 직선적이어서 시청자에게 거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간혹 이미지가 독창적이거나 유머가 담긴 광고도 보게 되는데, 에너지 절약이나 적십자 모금과 같은 공공 영역에 속하는 광고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반대로, 가끔 한국에 들어가 있는 동안 텔레비전을 보면 내내 불편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텔레비전 앞에서 느끼는 밋밋함은 무의식적인 싸움을 멈출 때 찾아오는 평온함 같은 것이다.

한국의 광고들이 시청자의 정신을 혹사시키는 그 지독한 긴장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업광고들이 노골적으로 계층 간 위계나 계급 간 구분을 판매전략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창회에서 두 명의 젊은 부인이 대화를 나눈 뒤, 어느 한쪽이 새로 이사 들어간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해서 “네가 더 성공했네”라고 말하는 광고가 그렇다. 아니면 아예 그런 스토리도 귀찮은 듯 그냥 단순 무식하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친구의 질문에 무슨무슨 차로 대답했습니다”라는 자본주의식 선문답을 내놓는다.

이런 종류의 광고는 상품에 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물의 소유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고 암시하고 주입할 뿐이다. 이런 광고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이유 없이 그 상품을 사회적 신분이 나뉘는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물건에 아무런 관심도 관계도 없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그 상품을 소유하지 못한 집단에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으로부터 위화감 내지 불안감이 생기면, 자 이제 악순환 속으로 빨려 들어갈 준비를 갖춘 셈이다. 친구를 만나고, 빚을 내고, 물건을 사들이고, 동료를 만나고…. 물론 끝은 보이지 않는다. 광고를 기다리는 상품은 무수히 많으니까.

상품의 잠재적 소비층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할 만한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광고 제작의 기본에 속할 것이다. 아이스크림 광고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미디언이 등장하면 좋을 것이고, 다이아몬드 광고라면 사치스러운 분위기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심각한 문제는, 어떤 상품이 두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가른다고 주장하거나 암시하는 경우다.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으로 즐거워하는 아이들 사이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뽐내면서 한 아이가 걸어간다면, 당신은 그것이 정당한 광고라고 생각하겠는가. 위에서 예로 든 승용차와 아파트가 바로 이 경우다. 고가품에 특히 이런 종류의 광고가 많은 것은, 그만한 비용을 들여 그 물건을 사야 할 이유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한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기에

광고가 개입하는 지점은 상품 간의 차이이지,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아니다. 국제상공회의소(ICC)의 광고활동 기준에 따르면, “상품의 소유가 다른 아이에 비해 우월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이점을 줄 거라고 아이들에게 암시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신분의 스트레스를 버겁게 껴안고 사는 한국의 어른들은? 그런 광고를 무시할 만한 힘을 기를 수 없다면, 마찬가지의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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