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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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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생명

등록 2009-05-28 10:15 수정 2020-05-03 04:25

생명은 하찮은 것이다. 우리는 늘 그걸 배우며 산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성공한 삶과 낙오자의 늪 사이에서 허우적대다가 심장과 뇌의 세포가 고단한 생명활동을 접는 순간까지.

태아 A: 생명은 위대하다지만, 생명은 또 얼마나 왜소한 건가요. 사람들은 작은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여기나요. 아직 아기를 가질 때가 안 돼서, 엄마가 결혼도 안 했으니까, 장애를 지니고 태어날 게 분명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작별을 고하죠. 생명의 존엄을 말하는 분들, 왜 낙태 반대 운동에 팔 걷지 않나요. 원하지 않는 잉태를 막는 것을 물론이고, 미혼모도 원한다면 자기 아기를 잘 키울 수 있게 지원하고, 장애아를 낳아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사회가 돕는 일, 그런 운동 말이에요.

어린이 B: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렸을 때 누가 우리를 책임지나요. 부모님이 가난하면 어떡하나요. 그건 내 책임도 아닌데. 하루 세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친구들은 누가 돌보나요. 그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한 해에 자동차에 치여 숨지는 어린이는 몇 명인가요. 생명을 존중한다는 분들, 왜 모든 어린이에게 건강과 안전과 꿈을 똑같이 나눠주는 세상을 위해 팔 걷지 않나요.

청소년 C: 그건 너희가 몰라서 그래. 난 이미 알아버렸어. 생명은 하찮은 것이거든. 자살하려는 친구들이 많아. ×같은 학교, 어른들 때문이지. 하지만 자기 자식만 아니면 아무 관심 없어. 죽는 건 늘 실패한 소수의 문제라고 치부하지. 우리가 아무리 죽어봐야 세상은 바뀌는 게 없어.

노동자 D: 벌써 그런 생각 하면 못쓴다. 너흰 아직 찬란한 미래를 기다릴 나이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고, 그 벽 안에서조차 등급을 갈라 차별하는 세상을 알게 될 때까지라도 말이다. 내 생명을 버림으로써 남은 동료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좋겠는데. 벽 너머 저자들은 나 같은 사람 한 명의 자살쯤은 우습게 여기고, 나를 추모하는 이들마저 과격·폭력 집단이라고 다그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우리 같은 사람은 목숨을 버리는 게 가장 크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철거민 E: 그래도 미련 많은 목숨인데, 그리하지 말게. 나도 잘난 것 하나 없지만, 아등바등 살아왔잖나. 없는 형편이지만 살게만 해준다면 세상에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살아보려고 망루에도 올라갔던 거고. 거기서 죽을 줄이야 몰랐지. 그래도 살아남은 우리 자식들한테 내 목숨값만큼은 좋은 날을 물려주나 했는데, 그 아이들을 아직도 저리 못살게 구는 놈들을 용서할 수가 없네. 그래, 우리네 목숨 하찮고 하찮은 것이지.

독거노인 F: 하루 종일 자리보전만 하고 있자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말기암이라니 더 이상 치료받을 생각도, 그럴 돈도 없지. 존엄사라고 하던가. 피붙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세상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게 품위 있다는 말씀…. 그렇게 한순간에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다면 더 소원이 없겠어. 나처럼 누추하게 천천히 죽어가는 노인네들에겐 그런 죽음이라면 더더욱 존엄사라고 할 수 있겠지. 마지막 순간이 늦어지는 건 바라지 않지만, 가끔씩 말 한마디라도 나누며 나도 한 생명이란 걸 느끼게 해줄 고마운 손길이 있다면 좋겠네. 생명이란 하찮은 것이지만 말이네.

이 모든 생명들을 보며 생명은 피어나는 꽃과 같이 아름답고 그 어떤 가치보다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누군가. 도덕 교과서에서든, 법전에서든, 권력자의 말에서든 생명 존중이란 거짓말이다. 생명은 하찮은 것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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