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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를 오고 갈 자유는 가능한가

등록 2009-05-26 18:51 수정 2020-05-03 04:25

을 보며 문득 이 위대한 작가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1943년생. 환갑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명징하게 십대의 삶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내가 가르치는 십대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청춘이란 특정한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거장이 거장인 이유는 그가 삶의 굽이굽이를 멈추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왔기 때문이라고, 거장의 마음을 배우자고. 그런데, 사람이 우습게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나의 진심 어린 훈화는 한순간에 빛을 잃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과 함께한 중앙아시아 순방으로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의 감동과 배신

좌우를 오고 갈 자유는 가능한가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좌우를 오고 갈 자유는 가능한가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김지하가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작가가 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 좌로부터도, 우로부터도 자유로운 삶,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아무리 중립적으로 보이는 행위나 발언도 실상 어느 편에 속한다.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교원평가, 심야보충수업 등 현안으로 논쟁이 뜨거워지면 꼭 이런 말머리로 중재를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저는 전교조도 교총도 아니지만….” 이 말머리는 무슨 뜻일까? 자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친 자가 아니고, 고로 자신의 의견 역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무사하고 공명정대한 의견이라는 것이렷다. 하지만 그는 중립을 자처하며 자신의 발언에 가치를 더하려는 수사학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정말로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잘 들어보면 어느 쪽인가를 편들고 있다.

심지어 어떤 주제를 쟁점화할 것인가에도 입장은 있는 법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에 ‘오륀쥐’라는 유행어를 낳았던 ‘영어 몰입교육’ 찬반 논쟁을 생각해보자. 당시 쟁점은 영어 몰입교육이 효과적인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고민해보아야 했던 문제는 “경쟁력 강화가 우리의 살길인가?” “영어를 잘하면 정말 경쟁력이 강화되나?”와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와 같은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논쟁을 싹 접고 영어 교육의 스킬에 대해서만 논쟁이 형성됨으로써 이익을 본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어떤 주제에 대한 논쟁을 멈추자고 할 때에도 입장은 있는 법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이 산같이 쌓였는데, 이제 그만 말하잔다. 논쟁이 중단됨으로써 누군가는 이익을 보지 않았을까?

공자와 제자가 나눈 대화를 보자. “마을 사람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가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졌던 조선 청년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몽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으로 노동권 실종의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을 어떤 자본가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존재에 충실하게 사는 자 누구나 자신의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좌와 우를 오가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기만적인 삶이다. 좌와 우를 자유롭게 오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라고? 부자들의 부는 많은 이들의 노동에 빚진 것이다. 큰 부자일수록 더 많은 빚을 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득에 따른 누진세제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 작가가 이룬 업적은 많은 이들의 사랑에 빚진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더 많은 빚을 진 것이다. 그러니 더 무거운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대학 시절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그의 책을 사서 날밤을 새우며 읽었던 그 시간들을 걸고 나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다.

동시대인에 대한 예의

이제 나는 의 ‘작가의 말’에서 황석영이 했던 얘기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주려 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누구나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게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단 한 번의 삶을 허락받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이다.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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