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경제 과목을 가르치다가 학급에서 한두 명 정도는 1학년 겨울방학에 미리 경제 과목을 공부하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어와 수학 공부에 온 나라가 매진하고 있는 현 시국에서 경제처럼 보잘것없는 과목에도 그처럼 과분한 관심을 보여주니 황송하기 그지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미리 경제 공부를 챙겼다는 것은 이미 미리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았다는 말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니 놀랄밖에.
다음 학기 준비는 선행학습도 아냐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미리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 중학교 대비를,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대비를 한다. 준비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을 이번 방학에 미리 공부하는 것은 선행학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선행학습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단연 영어다. 뱃속에서부터 영어 태교를 시작해 걸음마와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 얘기처럼 영어 공부와 관련해서는 괴담도 정말 많다. 가장 최근에 접한 영어 괴담은 C학원 괴담이다.
‘쉬운 영어’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충고해주었다. 그런 학원 계속 보내면 애 영어 완전히 망친다고. 그러면서 추천해준 C학원. 일주일에 두 번 하는 C학원의 수업에 맞춰 숙제를 하려면 하루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이제 아이는 초등 4학년, 고학년이니 마냥 어린애처럼 놀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쉬운 영어’ 엄마가 “저는 하루에 4시간씩 아이 숙제를 봐줄 시간이 없어요”라고 걱정하자, 곧바로 되돌아오는 처방. “원래 집에 있는 엄마도 그런 거 못해. 애랑 사이만 나빠지거든. 숙제 봐주는 ‘새끼 선생님’을 둬야지.” 헉! 이 학원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고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왜 다들 미리 공부를 할까? 하나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야 아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 상급 학교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은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상급 학교에서도 고생스러울 과정을 더 어린 나이에 당겨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창 자랄 나이엔 한해 한해가 다르다. 공연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다. 자라서 하면 수월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미리 하느라고 몇 배의 고생을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아이들이야말로 조기 영어교육, 수학 선행학습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자란 세대 아닌가. 그러니 뭔가 달라야 할 것 같지만, 영어나 수학을 그 전 세대 아이들에 비해 더 잘하는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이들이 ‘먼저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 공부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한다고 더 잘하는 것은 아니다.
자라서 하면 수월하게 끝낼 일을미리 공부하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들을 바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과정을 앞당겨 공부하려다 보니 아이들 앞에는 늘 가야 할 길이 멀다. 하루 4시간씩 투자해야 학원의 교육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아이들은 엄청나게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충분한 독서로 다져진 탄탄한 언어 능력(한국어 능력!)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다. 빈곤한 언어 능력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록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어 공부를 제아무리 많이 해도 외국어로 영어를 학습하는 아이들의 영어 능력이 모국어인 한국어 능력을 앞서갈 수는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독서를 즐기기에는 너무 바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지만, 나는 오늘 아이들에게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미리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싶다. 어린이날을 맞아, 오늘은 오늘 할 일만 할 권리를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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