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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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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특강

등록 2009-01-08 10:23 수정 2020-05-03 04:25

새해 벽두에 전직 대통령들이 이런저런 자리를 빌려 일제히 ‘민주주의 특강’을 했다.
“국회 절차가 있는데 도끼 같은 것을 갖고 국회의사당을 깨는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 국회의장이 참을 만큼 참았고, 해도 넘겼으니까 이제 (법안 상정을) 직권으로 단호히 해야 한다.”(전두환씨)
“국회의원들은 다수의 표로 당선됐으니 다수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 야당 시절 험악하게 싸우고 국회의원에서 제명까지 당했지만 쇠사슬을 묶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김영삼 전 대통령)
“지난 1년 동안 민주주의가 큰 도전을 받고 20~30년 전으로 역주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강권정치나 억압정치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김대중 전 대통령)
앞의 두 견해는 어쨌든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 국회를 구성했으니 다수당의 정책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소신에 바탕해 1996년 말 안기부법·노동관계법 날치기를 성사시켰으니 그렇다 치고, 전두환씨는 총칼로 민주 시민의 육신을 깨뜨리고 집권한 장본인으로서 민주주의에 관한 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머지 한 견해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듯싶다. 선거라는 대의민주적 절차는 일회적인 만큼 이후에도 주권자의 지향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그에 따른 정책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잭 도널리는 절차적·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인들은 특히 절차적 의미의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인식은 대부분의 경우 옳지만, 민주적 절차를 실질적 결과로 ‘테스트’해보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다. 예를 들어, 대다수 중앙아메리카의 선거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은 정부가 실제로는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해왔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온 국민의 저항을 잠재우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밀어붙였다. 또 4대강 정비 사업은 국민의 55.8%가 반대하고 방송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은 61.1%에 이르는데(문화방송 조사), 정부·여당은 막무가내로 또 밀어붙이려 한다. 다수에 복종해야 한다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떤 수를 쓰든, 어떤 요행을 타든 일단 의회의 다수를 점하기만 하면 국민이야 뭐라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한꺼풀 형식주의로 오그라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제에선 대체복무 허용에 반대하는 의견이 68.1%에 이른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이미 굳게 약속했던 대체복무제 추진을 백지화하려 한다. 국제사회에 했던 약속도 안중에 없다. 어떤 문제에선 다수 여론을 등에 업고, 어떤 문제에선 다수 여론을 백안시한다.
다시 잭 도널리의 설명을 빌리면,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는 다수가 자신들의 권리나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존중돼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사회가 다수의 뜻으로 특정 개인이나 소수 집단을 학대할 수도 있는 만큼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은 다수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보호해야 한다. 이런 ‘두 차원’의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게 대다수 선진국들의 민주주의 모델이다.
반면 정부는 다수의 뜻을 따라야 할 일반 정책에선 다수 여론을 무시하고, 인권의 원칙을 따라야 할 정책에선 다수 여론을 무기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 한다. 상식을 정확히 180도 뒤집은, 절묘한 한국식 민주주의 모델의 탄생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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