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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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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주의

등록 2008-08-12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얼핏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개인주의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돼 있는 허무주의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만물의 척도’이며, 나의 내면의 가치와 견해와 감성이야말로 나의 생활과 사회, 나아가 우주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중에 과연 그렇게 자기 개인의 내면을 우주 전체의 척도가 될 만큼 풍부하고 확고하게 가꾸어놓은 이가 몇이나 될까. 그래서 우리는 간헐적으로 이 허무주의의 엄습을 겪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세상의 의미와 인생의 의미와 같은 문제들의 답을 우리 밖에서 얻으려 해보지만 그래봐야 ‘개인주의 사회’는 알아서 하라는 차가운 대답과 함께 침묵을 지키기 마련이다.

삶과 세상의 의미, 내 새끼

어쩌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낳은 서양 사회의 개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데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한 지 반세기도 채 되지 않은 한국인들은 아직 그렇게 ‘쿨’하지 못하다. 그래서 자기 삶과 세상의 의미에 대해 대답 못하는 ‘나’를 버리고 그것을 대답할 수 있는 ‘나’를 필사적으로 찾게 마련이며, 바로 자기의 새끼에서 그것을 찾게 된다. 한국 사회의 일천한 개인주의의 전통은 이렇게 오로지 ‘내 새끼’ 하나만을 물고 빨고 온갖 돈을 퍼부어대는 ‘내 새끼 주의’로 귀결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최고 이념은 바로 이 ‘내 새끼 주의’다.

우리 사회가 골머리를 앓는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바로 교육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교육 문제에 임하는 철학의 기초는 바로 ‘내 새끼 주의’다. 이러니 답이 나올 길이 없다. ‘남의 새끼’는 어떻게 되는가. 교육 문제가 제기되고 해법이 나와야 할 차원은 전체 사회와 전체 성원의 이익이라는 차원이지 ‘내 새끼를 어떻게 더 잘나가게 할 수 있을까’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버이로서 내 새끼만의 미래가 아니라 옆집, 옆 마을의 아이들까지도 함께 고민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본래 집단적인 것이다. 전체 사회 구성원 자녀들의 지적·교육적 수준이 함께 상승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내 새끼만 탁월한 지적·교육적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란 본래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금 깊게 생각해본다면, 본래 ‘내 새끼’도 ‘남의 새끼’도 있을 수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우리 모두의 똑같이 소중한 미래이며, ‘내 새끼’의 행복과 미래도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가진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느 새 ‘내 새끼 주의’로 변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내려가고 있다.

얼마 전 서울시교육감 선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맘에 드는 정책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급적 ‘우리 아이들’ 전체를 고르게 똑똑히 키워보자는 방향을 지향한 후보가 결국 아깝게 낙선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당신의 아이’가 더욱 잘 배울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외쳤던 이가 당선됐다. 결과를 보니 이 ‘내 새끼 주의’가 더욱 극성을 부리는 곳으로 알려진 동네에서 상당한 표가 후자에게 쏟아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혹자는 ‘계급 투표’였다고까지 논평하고 있다. 나는 당선된 후보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내 새끼 주의’의 포로가 되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러한 선택이 나아가 모두의 자녀에게 이로운 방향이라고 진정으로 믿어서 선택한 이들도 많을 것이며, 그러한 견해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할 능력도 없다. 하지만 부인하기 힘든 것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 문제와 이번 교육감 선거를 은연중에 지배하는 사고방식은 ‘내 새끼 주의’ 쪽이지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라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내 새끼’는 어찌어찌하여 잘된다고 하자. ‘우리 아이들’ 전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어느 인터넷 포털에서는 ‘연령별로 가장 많이 읽은 기사’를 알려주는 장치가 있다. 얼마 전 그것을 열어보니 10대가 가장 많이 본 기사는 ‘한-미 방위비 분담금’이었던 반면, 20대의 그것은 시트콤 이었고 가수 성시경 운운, 저스틴 팀버레이크 운운의 기사가 뒤를 잇고 있었다. 지금 20대야말로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확산된 ‘내 새끼 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이들이다. 개개인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의 집단적인 지적·교육적 수준이 이러하다. 우리 사회가 안팎으로 커다란 도전과 혼란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20대 청년들의 관심사는 ‘크크섬’이라니. 이러한 세대가 만들어가는 사회에서 노년을 보내야 할 나는 근심이 태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대를 계속 만들어낼 ‘내 새끼 주의’가 저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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