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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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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문사 합동 추모식장에서

등록 2008-06-20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망설임을 나무라듯 내리는 비에 바람까지 거세졌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사력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슬픔의 무게 때문에, 생을 잃어버린 삶 때문에, 끝 모를 외침 때문에 유가족들을 대면하는 건, 부끄럽지만, 다른 활동가의 몫이 되길 바랐다. 하여, 내내 쌓아둔 미안함에 추모제 참석이라도 하자며 나선 길이건만, 군의문사 합동 추모식장 안에 들어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614명의 이름들. 갈용권, 강동암으로 시작된 이름은 무명씨로 끝을 맺었고, 장내는 통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라고 한 번만 불러달라고, 그 얼굴 한 번만 보여달라고 절규하는 부모들. 형제와 지인들은 계단 곳곳에 웅크려 눈물을 흘리고, 철모르는 아이는 엄마 등 위에서, 할아버지 품 안에서 한참을 칭얼거린다.

규명위 활동기한은 올해 연말까진데…

치솟는 등록금을 감당할 길이 없어,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철이 든다고, 국방의 의무를 돈으로 면피하는 놈들은 국가도 없는 놈들이라 힐난하며 보낸 군대. 하지만 몸 성히 돌아오겠다던 아들이 주검으로 돌아오자 부모는 “힘없고 무식한 내가 아들을 죽였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자책은 분노가 됐다. 조사 기록을 보여달라는 호소와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요구가 일언지하에 묵살되고, 한순간에 ‘자살’ 등으로 종결된 조사 때문이다. 죽음을 통탄하고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아들을 의혹의 무덤에 파묻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국가권력 앞에서, 무소불위의 군 앞에서 유가족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 앞에서 ‘죄인’이 되어 살았다.

숨죽여 울던 수천의 울음이 ‘군의문사’란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알려진 건 1999년. 김훈 중위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유가족들이 군대 내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을 때다.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세월을 모두 내어놓고 달려온 투쟁은 2005년 ‘군의문사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제정과 2006년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 설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진상규명위는 화답이라도 하듯 진정된 600여 건의 사건 중 올해 초까지 148건을 재조사했고, 이 중 43건의 진상을 밝혔다. 단순사고사나 병사 등으로 은폐된 사건이 타살이나 폭행에 의한 죽음으로 밝혀졌고(5건), 내성적인 성격, 가정 문제, 여자 문제 등으로 ‘나약한 개인’이 행했다는 자살 18건 중 17건이 구타와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를 견디지 못한 ‘타살적 자살’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지금, 유가족들은 애가 탄다. 피가 마른다. 올해 연말이면 진상규명위의 활동기한이 끝나기 때문이다. 남은 반 년간 남은 450여 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하다. 또한 2006년 이후 발생한 군의문사에 대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방법이 없다. 특별법이 진정 대상을 2005년 12월까지로 한정해놓은 탓에 그 뒤 발생한 200여 건의 죽음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조차 막힌 상태다.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가 있긴 하지만, 법의학적 전문성, 군이라는 특수성, 각 위원회의 권한과 인력 등을 감안하면 두 위원회에서 진상규명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진실이 밝혀진 유가족도 애가 닳는다. 군이, 국가가 내몬 죽음이건만 아들은 여전히 불명예스러운 자살자일 뿐 아무런 국가적 예우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징병하는 국가에서 군대 내 부조리에 의한 자살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건만, 국가는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한다.

군대 내 자살은 국가의 책임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죽은 이를 가슴에 묻고 사는 유가족들. 21명의 젊은이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진상규명의 날만을 바라며 차디찬 냉동고에서 수년째 잠들어 있다. 죽어간 한 명 한 명이 더없이 소중한 인간이기에 조직 보신을 위한 수사는, 권력다툼으로 관련 법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더러운 일 따윈 이제 끝을 봐야 한다. 단 한 명의 죽음도, 단 하나의 의혹도 가벼워지지 않는 세상이, 망자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날이 이제는 도래해야 한다. 부디 그날까지 유가족 모두 강건하시길. 단 한 명의 생명도 ‘국익’이란 미명하에 사라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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