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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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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귀

등록 2008-06-20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마감 임박’이라는 뻔한 멘트에 지름신이 강림하시고 샘플 하나 주면 본 제품을 덜컥 사버리는 설득당함의 귀재들. 일부 남자들은 이야기한다. “그건 여자들의 공통점 아냐?” 그러나 귀 얇은 것에 남녀 구별은 없다. 수컷으로 태어난 내 귀도 국가대표 ‘팔랑귀’다.

그 팔랑귀가 어느 회사 사장님을 만났다. ‘님’의 카리스마는 엄청났다. 그 회사 직원들, 사장님 인상 썼다 하면 모두 꼬랑지 내리기 바빴다. 집안에서는 어떨지 궁금했다. 아니나 달라, 듣자 하니…, 한번은 방 청소를 제대로 안 하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려고 방에 어지럽혀진 아이의 책, 옷 등등을 자루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단다. 진도는 계속 나간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있더란다. 이번에는 큰 대야를 가지고 와 냉장고의 모든 음식을 죄다 쓸어담았단다.

그 사장을 만나고 며칠 뒤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았다. 가장이 일찍 퇴근했으니 분위기도 좋았다. 얼큰한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갑자기 소주 생각이 났다. “지난번에 내가 마트에서 사온 소주 좀 줘.” 아내가 갑자기 무슨 소주를 마시냐며 맥주를 꺼냈다. “찌개에 무슨 맥주야, 소주를 줘.” “맥주 마셔.” “소주 줘.” 그러다가, 아내가 실토했다. “그거 지난번에 내가 잠이 안 와서 조금 마시고는… 버렸어.”

순간 집안이 냉각됐다. 내 얼굴, 냉각됐다. 그까짓 소주, 아내가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때는 하기도 싫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고생하다(?) 와서, 내 소주도 내가 못 먹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훈련병 때 내 우유를 동기 놈이 홀랑 먹은 거보다 백배는 더 억울했다. 아내가 쩨쩨하다고 할까봐 노골적으로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천배는 더 억울했다. 지금 이 자리에 아이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별걸 다 가지고 삐치고 그래’라는 듯 쳐다보는 것이 만배는 더 억울했다.

맛있는 찌개는 식어가는데 밥을 목구멍에 꾸역꾸역 넣다가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를 물었다. 남편의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처분하는 여인에게 복수를 꿈꿨다. 그때, 귀 팔랑거렸다. 옳거니! 나는 큰 상자를 가지고 와서, 요즘 천연 비누에 심취해 있는 아내의 비누를 거기에 마구 담았다. 말도 없이 담았다. 방에서 ‘패밀리’들이 아빠의 이상한 행동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신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경비실 옆의 재활용품 버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상승되는 결단의 행동 앞에서 경비 아저씨가 “재활용 쓰레기는 목요일에만 버리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럼 여기다 잠시 놔둘게요, 이러고 다시 집에 올라왔다. 그새 아내가 슈퍼에 가서 소주 한 병을 사왔다. 한 잔을 따라주기에 그랬다. “당신도 내가 소중해하는 소주를 버렸으니 나도 당신이 소중해하는 것을 없앤 거야.” 멋지다! 이 대사. 그러면서도 그새 누가 비누를 가져가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여자만 귀가 얇은 것이 아니다. 남자는 귀도 얇고 속도 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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