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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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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변비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세상에는 매일 접하는 것이지만 질리지 않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밥과 같은 것. 식상하다고 안 먹는 사람은 없다. 늘 반복되는 배고픔은 그 자체로 새로움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밥 먹는 횟수만큼이나 더 들었을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 넌덜머리가 날 법도 하련만 가슴이 울렁거린다.

심리학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키워드다. 사람이 받아야 할 사랑의 임계지수가 기준 이하일 때 모든 마음의 고민은 시작되며 그것이 충분할 때 마음 치유의 명약이 된다고 한다.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의 정도를 심리분석 기준으로 사용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모두 평생 복용하고 배설해야 할 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중년에 접어든 어른들은 설렘에의 욕구와 애정 분출에의 신호는 줄어들지 않지만 대상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 중년의 위기는 다른 말로 ‘애정변비’인 셈이다.

이를 해결하려고 바람을 피운다거나 외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마저도 하지 못하는 다수의 바른생활 중년들은 ‘염치없음 증후군’의 부작용을 겪는다. ‘공공장소에서 고함지르며 휴대전화 받기’ ‘길거리에서 가래침 커억 뱉기’ ‘마트에서 카트로 사람 치고 생까기’ 등이 대표적 증상들이다. 원인은 삶에 긴장감이 없다는 것, 긴장감이 없는 이유는 연애 감정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

긴장감과 관련해서 내 이야기를 해보자. 이웃집 여인을 흠모하는 한 중년 남자의 위험한 고백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가족과 외식을 했다. 연탄불에 갈비를 지글지글 구워먹고 있는데, 앗! 전방 15m에 한 아름다운 미시님이 앉아서 고기를 드시는 거다. 흘끔흘끔 바라보며 전망을 즐기다 아내에게 말했다. “저기 저 앞에 여자, 예쁘지 않아? 에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지 말고!”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그 여인에게 인사를 하는 거다. 그녀는 바로, 복도를 함께 쓰는 아파트 앞집 여인이었던 것이다. 아내의 행동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며칠 뒤에는 앞집 여인에게 “우리 신랑이 자기 예쁘대”라고 일러바치기까지 했으니, 주책바가지 내 아내에게 질투는 남의 것이다.

덕분에 이웃집 여인과의 관계가 매우 어색해졌다. 멀리서 씩씩하게 걸어오다가도 나를 발견하면 갑자기 다소곳 모드로 새색시 워킹을 하는 그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붉게 물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떨구고 마른 침을 꼴딱 삼키는 그녀, 집안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도 우리 집 문 여는 소리만 들리면 목소리가 뚝 끊어지는 그녀.

그녀만 그런가? 나도 마찬가지다. 칠레레팔레레 추리닝 복장으로 슈퍼를 가려다 혹 그녀를 만날까봐 단정한 복장을 갖추기도 하고, 헬스클럽에서 우연히 만나면 러닝 자세도 힘차게 힘차게, 인사를 할 때도 목소리 탁 깔고 “안녕하신지 말입니다”.

이 외도 덕분에 앞집 여인과 나는 아주 간지나는 중년의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여기서 교훈은 나이가 들수록 연애 감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집 여자를 짝사랑하고, 신입 여직원을 속으로만 흠모하며, 효리와의 데이트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감신경에서 아드레날린이 찍 하고 분출되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생리적 환기’는 벽에 응가칠하는 그날까지 인간이 즐겨야 할 필수 감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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