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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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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불망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얼굴이 다르듯 성적 취향도 제각각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듯, 자기가 하면 정상이고 남이 하면 변태인 것이 또한 성적 취향이다. 관음, 동성애, 페티시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중 또 하나, 가학성(사디즘)과 피학성(마조히즘)도 대표적 몰래 즐기기다.

영화 에서 권위 있는 여교사는 자동차 극장을 서성거리며 외간 남자의 체액 묻은 휴지에 흥분하고, 미드 에서 브리의 남편은 매춘부의 구둣발에 짓이겨지는 섹스를 즐긴다. 박완서의 에서도 복희씨 남편은 잠자리에서 이런 주문을 한다. “내가 처음 너를 겁탈했을 때처럼 반항해봐, 으흥.”

그 남자도 가학의 로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렇다고 채찍을 휘두르거나 촛농을 떨어뜨리며 개목걸이로 이랴이랴 하는 수준은 아니고, 언어의 가학, 이른바 욕하기 정도의 판타지였다. 김 과장, 이 부장에게 군기 잡힌 설움을 잠자리에서 자기 여자에게 풀어버리고 싶었다. 혹은 억눌린 마초 기질의 표출이거나.

그 남자가 결혼했을 때, 그는 ‘첫날밤’만큼 ‘그날 밤’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새색시를 상대로 멀쩡하고 교양 있는 낮의 남편이 밤이면 ‘이뇬저뇬’ 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딱 이혼감이자 이혼 뒤에도 평생 변태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을 위험이 있었다.

결혼이 중기로 접어들 시점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도를 해봤다. 절정의 순간에 “개해년”이라고 육십갑자 용어 하나를 발설했다. 반응? 싸늘했다.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전 모의가 필요한 거구나. 그리하여 짬짬이, 인간의 무의식 어쩌고, 건강한 섹스는 그 무의식의 표출 저쩌고, 남들도 침실에서는 저들만의 밀교를 진행하네 등등 이러쿵저러쿵 세뇌를 했고 결혼 십수 년이 넘어간 즈음에는 개해년이라 하든, 쌍팔년이라 하든, 마음껏 드림이 ‘★컴트루’되는 성과를 얻어냈다.

한데 예기치 않은 복병이 출몰했으니 얼마 전 일이다. 마흔 넘은 부부의 침실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다. 남편이 성적 부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아내는 찜질방이나 미용실에서의 온갖 귀동냥을 밑천으로 밤의 진화를 달린다. “이러면 더 좋아?” “이건 어때?”라며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실험으로 남편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득의양양 미소를 지으며.

그날 밤도 그랬다. 그 남자가 정상에 오르며 사디즘의 카드로 개해년을 뽑아들었을 때, 평소 19세기 순종녀의 모드로 침묵 속에서 그 남자를 지원하던 아내는 나지막이 그러나 끈끈한 어조로 조렸던 것이다. “18세기.”

장군 멍군도 아니고 무슨 화답가를 나누는 사랑가도 아니고 ‘개해년’에 ‘18세기’라는 맞장구를 듣고, 그 남자는 오그라들었다. 신화가 손수건을 흔들며 떠나고 있음을 알았다. 아내들아, 부탁하자. 침실에서는 너무 앞서가지 말아줘. 그 남자가 원한 것은 18세기가 아니라 19세기였거덩! ‘20세기’는 더더군다나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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