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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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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도 남자

등록 2008-07-03 00:00 수정 2020-05-03 04:25

▣ 윤용인 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인터넷 엽기문화를 선도하며 웃기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던 의 르네상스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이었다. 회사 분위기도 기사만큼이나 홀랑 깼으니, 대표적 사내 이벤트로 ‘매력남 선발대회’가 있었다.

‘왜 암컷은 수컷에게 일방적으로 간택당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 페미니즘으로 무장된 ‘딴지녀’들이 작당한 이 행사는, 여직원 대표의 인트라넷 공지와 함께 달아오른다. 한 달 뒤 선발대회가 있는 만큼 모든 남직원은 여직원을 향한 무한한 알랑방귀와 섹시하고 정력적인 자태를 마음껏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눈 안에 들라는 내용이다. 수상 분야는 ‘영예의 초매력남’ ‘헤플 거 같은 넘’ ‘대주고 싶은 넘’ 등 세 가지로 못을 박는다. (젊잖은 독자들이여, 민망해 마시길. 실제 그렇게들 놀았으니.)

이때부터 ‘딴지남’들은 “나 참, 이건 성희롱이야” “시간들 많은가봐?” 등으로 빈정대지만 여직원 앞에서 ‘썩소’를 날리거나 퇴근 뒤 사무실 러닝머신기 앞에 줄을 선다거나, 화장실 소변기 앞에 오래 서 있기 등 암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런 행사에 전혀 관심없어 보이는 간부들이 여직원과 일대일 면접을 유독 많이 요청하는 것도 이때다. 각 분야 3위까지 공개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자기 이름이 한 번이라도 호명되지 않음을 내심 우려하는 처절한 본능적 몸부림이다.

드디어 디데이, 점심시간에 근처 보쌈집에 모인 여직원 전체는 식당 아주머니를 참관인으로 하고 1인 1표의 투표권을 공정히 행사한다. 개표 결과는 오후 회의실에서 전체 직원 호출 뒤 발표된다. 딴지남들은 툴툴거리며 소란을 가장하지만 개표하는 여직원의 입을 바라보는 눈빛은 ‘간택’에의 기대감과 ‘공개적 성적 매력 거세당함’의 불안감을 동시에 품으며 반짝거린다. 발표의 순간에는 나지막한 환호와 은밀한 신음, 폭동이 일어날 듯한 야유와 냉소가 터져나온다.

거의 십 년이 다 돼가는 당시의 선발대회를 지금 회상하는 이유는, 개표 결과의 의외성 때문이다. 수많은 꽃미남, 상큼단단한 총각들을 제치고 각 부문 수상의 영광은 거의 대부분 늙다리 유부남 임원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는 권력지향형 여성집단을 가장하면서, ‘장난은 장난으로 끝내자’는 속 깊은 여직원들의 배려가 원인이었겠다. 오랜만에 써보는 “바뜨”! 그날 이후 수상한 유부남들은 장어 100마리를 한 큐에 고아먹은 것보다 더 기세등등했음도 비사(祕史)로 전해진다.

그리고 2008년.

“남친 있어요? 여기 있는 남자 중에서 한 명을 고르라면 어떤 스타일을 고를 거야?” 워크숍 뒤풀이 콘도 방에서 신입 여직원을 향해 부장이 쉰 목소리로 농담 삼아 묻는다. 주위를 휙 둘러보는 여직원. 마흔 넘은 부장과 그보다 더 늙은 사장은 침을 꼴딱 삼킨다. 옆 자리 총각 직원들 속에서 자신들도 여전히 싱싱한 고등어임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그러나 여직원의 “여기는 없는데요”라는 말 정도는 맞을 만한 화살이다. 그 이유를 한 사람 한 사람 꺼내서 품평하면서도, 끝내 부장과 사장은 품평의 대상에도 올려놓지 않고 술자리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베란다에 나가 독 묻은 화살 자국을 니코틴으로 뻑뻑 문지르며 중얼거린다. ‘썩어도 준치, 늙어도 남자이고 싶은 거거든. 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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