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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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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상품 개발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가 며칠 전 ‘7% 성장 능력을 갖춘 경제: 세부 실천 계획’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금융 허브에서 서비스 산업까지 한국 경제를 고성장의 풍선에 매어달 온갖 계획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유독 눈을 끄는 항목이 있다. ‘해외 환자 유치 활성화’이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외국인 환자에 대한 유인 및 알선을 허용하기 위해 의료법 개정 등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단순 저가 질환보다는 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상품 개발”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병원 가서 흥정해본 적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의료 분야가 무궁무진한 잠재적 시장을 가진 거대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부처님은 언젠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전 우주와 같은 크기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그러니 ‘노다지’를 캐기 위해 산골짝으로, 사막으로, 대륙붕으로, 달나라로, 화성으로 헤매고 다닐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다시 한 번 도인들 말씀처럼 ‘내 안에서 찾으라’.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생겨나는 갖가지 질병이 바로 돈이고 상품이다. 이미 생명공학과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의료산업은 가장 유망한 ‘고부가가치 산업’이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고 해도 결코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이 의료라고 굳게 믿는다. 무슨 도덕적 이유에서가 아니다. ‘인간 만사에서 시장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주장은 시장에 참가하는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계약 조건을 자유로이 찾아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의료의 경우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와 그것을 ‘구매’하는 환자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지식과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 ‘의료 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은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는 성직자들과 그들에게 영혼 구원의 전권을 넘겨야 하는 신도로 이뤄진 ‘종교 시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의 효율성과 역동성의 기초가 되는 ‘흥정’(higgle & haggle)을 병원에 가서 의사와 해본 이가 얼마나 되는가.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하라면 해야 한다. 항암제를 먹으라면 먹어야 한다. 배를 째고 장을 들어내자고 하면 째고 들어내야 한다. 살려만 다오. 건강만 다오. 시키는 대로 다할 것이며, 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이 기능할 것이라고 믿는 이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상품 개발’이 활성화된다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병원에 갈 때마다 ‘중증 질환 위주의 진단’을 받고 그에 해당하는 ‘고가 상품 서비스’를 받게 될 확률이 점점 커진다. 이명박 정부의 계획은 그저 돈 많은 외국 환자들을 유치하자는 것이니 꼭 국내에서도 ‘중증 질환 시장 활성화’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럴까.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특정 산업을 국제적인 수출 산업으로 성장시키려면 먼저 내수 시장을 활성화해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산업화 전략’의 일반적 수순이다. ‘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상품 개발’을 위해서는 고급 인력과 첨단 장비 및 시스템 등을 갖추기 위해 많은 양의 초기 자본이 투하될 것이다. 돈 많은 외국 부자들을 본격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누군가가 그것을 ‘소비’해주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의료법을 포함한 다양한 ‘국내’ 제도 개선이 약속되고 있다. 모름지기 ‘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의료 상품’을 타깃으로 하는 다양한 의료보험 상품 시장이 성장할 것이며, 이를 통해 금융 허브의 꿈도 더욱 영글어갈 테니, 실로 일관성 있는 계획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가 상품 내수 시장 활성화?

지난해 나는 예금통장을 가지고 있다는 죄 하나 때문에 은행 직원에게서 ‘암보험’ 가입 권유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예쁜 목소리로 “요즘은 암이 감기처럼 흔하잖아요? 암보험 몇 개는 들어두셔야…” 운운하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충격의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귀하는 매년 두 번씩 암에 걸리시느냐”고 응수해 겨우 전화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몸살 기운에 콧물·기침이 나올 때마다 “혹시 암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 두려움은 배가 아플 때마다 장암을, 가려울 때마다 피부암을 걱정하는 조바심으로 금방 자라난다. 아무래도 조만간 ‘암 검진’을 한번 받아야겠다.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중증 질환 위주의 고가 상품’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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