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높은 벽에 둘러싸여 산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외부인은 주민등록번호를 적거나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한다. A동 2011호 아줌마도 C동 3102호 아저씨도 ‘프라이버시 완벽 보호’를 요구한다.
한국의 주상복합아파트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사이버 세상을 떠올렸다. 각자의 PC엔 방화벽이 높게 쳐져 있다. 각종 사이트는 회원 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휴대전화 등을 통한 ‘실명인증’을 요구한다. 곳곳에서 개인정보를 요구해놓고 언제나 ‘개인정보 몇만 개 유출’은 예상치 못한 사건, 큰 뉴스가 된다. 유출을 막는 일은 또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다.
주상복합과 사이버 세상엔 불신이 뿌리 내렸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냐. 익명에 가려진 ‘너’는 공포의 대상이다. ‘○○님, 안녕하세요?’라며 오는 이메일, 죄다 스팸이다. 삭제. 아는 사람이라도 갑자기 건네는 파일이나 링크는 의심스럽다. 거부. 선물을 준다는 이벤트에 주민등록번호를 넣으라 하면, 그럼 그렇지 한다. 창 닫기. 어느 순간 거대한 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게 된 우리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 사이버 세상은 오프라인 도시의 빡빡한 삶을 무척 닮았다.
지난해, 인터넷은 선거법으로 시끌시끌했다. 많은 이들이 글 몇 줄에 경찰의 부름을 받았다. 선거법이 지정한 실명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인터넷 선거실명제 폐지 공동대책위는 인터넷 실명제를 ‘정보인권 침해이자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넷을 통해 민주주의가 진보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다 감시해버려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남의 얘기다.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 기간에조차 정치 참여가 가로막히니 걸릴까 무서워 쉬쉬하는 시대가 왔다.
실명제 잘 지켜 건네준 개인정보는 대량 유출에 쓰인다. ‘옥션 1979년 11월1일생 회원정보 해킹 사건’에 세상이 또 한번 뒤집혔다. 하지만 뭘 놀라는가. 지금도 중국 사이트에는 한국 주민등록번호가 둥둥 떠다닌다. 한 사이트에 가입하면 계열사들에게까지 내 정보가 둥둥둥. 가입하면서 불안해도 별 수 없다. 도대체 왜 회원 가입시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 것 같냐고 한 기업에 물었다. “주민등록번호 하나면 나이별·성별로 취향을 파악, 분류하기도 쉽고 전체적으로 회원관리가 쉽다”고 한다. 좋겠다.
실명제 예찬론자 말처럼 악플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신망 위에서라면 악플이 제격이다. 악플에 입은 상처도 선거법에 짓눌린 경험도 얘기 들어보면 양쪽 모두 가슴 아프다. 답이 없다. 어차피 우린 서로 믿지 않으니.
오늘도 개인정보 대량 유출이 뉴스가 되고 내일도 ‘짝퉁 악성코드 치료프로그램’이 판을 친다. 늘 있는 일인데 늘 ‘뉴스’란다. 은행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더듬대며 깔아대는 보안 프로그램에 짜증이 나면서도 내 계좌 정보가 유출될까 걱정도 한다. 영화 동영상을 공짜로 보고 싶어 기웃거리면서도 이상한 프로그램들까지 같이 내려받게 될까 불안하다. 이메일로 메신저로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세상이 이걸 알고 불륜의 증거라고 흔들어댈까봐 털이 쭈뼛 선다. 불신의 망 위에서 우린 외친다. 이 편리하고 신통방통하고 없어서는 안 될, 이 죽일 놈의 PC야!
* ‘임지선의 이 죽일 놈의 PC’는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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