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그는 조금 지쳐 보였습니다. 예전에 몇 차례의 만남에서 느껴졌던 특유의 활력과 자신감을 간간이 내비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슴 깊숙이 자리한 긴장감을 다 가리진 못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상대가 다름 아닌 삼성이라면야.
김용철(49) 변호사.
변호사라는 지금 직함보단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이라는 전직의 무게가 훨씬 무겁게 와닿는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1997년부터 7년 동안 삼성의 ‘핵’ 안에서 일하며 경험한 삼성의 어두운 그늘을 털어놨습니다. 몰래 자신의 이름으로 개설한 차명계좌를 이용한 수십억원의 비자금 관리, 2003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 얽힌 부도덕한 뒷얘기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삼성의 ‘맨얼굴’을 세상에 알릴 겁니다(사제단의 일정대로라면 이번호는 기자회견이 끝난 뒤에 배포됩니다).
사제단의 회견을 생각하니 1987년이 떠오릅니다. 그해 5월18일 사제단은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6월항쟁은 강고했던 5공화국의 독재 정치권력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이 흐른 지금, 이번엔 ‘경제권력’의 상징인 삼성에 사제단과 함께 김 변호사가 ‘도전’합니다. 물론 그 도전의 지향점은 ‘무너뜨림’이 아니라, 1인 총수 지배체제가 가져오는 왜곡과 부작용의 정상화일 테지요.
한국 사회에서 삼성이 지닌 힘에 대해선 더이상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참여정부 중반기인 2005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한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에서 ‘시장’을 ‘삼성’으로 바꾼다 쳐도 큰 이견이 없을 겁니다.
김 변호사는 넓게 보면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내부고발자 또는 공익제보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습니다. 한 개인의 용기 있는 발언이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우리는 이제 그와 함께 시험대에 섰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영웅’으로 미화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어떤 의미에선 그 역시 부도덕한 행위의 공범이나 종범이었으니 말입니다. 조금은 종교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행동을 ‘양심고백’으로 칭했으면 합니다. 그 양심고백의 대가로 김 변호사에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 놓이겠지요. 여태껏 특수부 검사와 대기업 고위 임원, 변호사로서 안락과 편안함을 누렸다면, 앞으론 힘들고 거친 시련을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팍팍한 길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김 변호사의 고백을 표지이야기에 담기 위해 잡지 제작이 48시간 늦어졌습니다. 아마도 정기독자분들은 평소보다 하루 이상 늦게 을 받아보게 될 겁니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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