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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의 명동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김자영, 제윤옥, 남천오, 김병기, 계훈구, 김지곤, 허홍범, 박원주, 김용하, 전인표, 김희종.
혹 이 열한 분의 이름을 기억하시는지요. 20살 안팎의 새파란 나이에 일제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지옥을 경험하며 생명을 지켰지만,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엔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으로 모셔져 있는 생존 한국인들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으되 ‘죽은 목숨’인, 어처구니없는 신세의 어르신들입니다.
대부분 여든을 넘긴 이들의 목소리는 간명합니다. “죽기 전에 야스쿠니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 은 지난 656호에서 이들의 기막힌 사연을 전하며, 일제 때 일본군이나 군속으로 끌려가 희생된 한국인 유족 등이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합사자 명단 말소(합사 철폐) 소송을 지원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 소송의 원고에는 생존자인 김희종씨도 포함돼 있습니다.
5개월 이상 진행된 캠페인에서 은 한국과 일본, 대만의 평화·양심 세력의 눈으로 야스쿠니신사에 비친 21세기 일본의 맨얼굴을 확인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를 통해 본 일본의 모습에선 우경화라는 불길한 기운이 배어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입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이후 일본 최고 정치 지도자의 신사 참배 강행은, 힘에 기반한 정치·군사 대국으로 나아가려는 일본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내줍니다. 은 야스쿠니신사의 현재적 의미를 짚고, 그 속에서 동북아의 연대와 평화로운 발전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부끄러움도 조금은 덜었습니다. 지난 2001년에 시작돼 6년 이상 진행돼온 합사 취하 소송의 비용은 지금까지 일본의 재판지원회와 변호인단(일본인 변호사 3명과 재일 한국인 변호사 2명)이 맡아왔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분노를 쓰다듬고 왜곡을 바로잡는 무거운 짐을 일본의 양심세력이 홀로 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짐을 함께 떠맡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 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소박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 예금계좌로 250명, 자동응답전화(ARS)로 880명 등 1천 명이 넘는 분들이 성금을 보내주셨습니다. 특별 후원 공연인 관람을 통해 600만여원의 성금을 보탠 분들도 큰 격려와 힘이 됐습니다.
이번 캠페인은 9월15일 서울 명동에서 아름다운가게와 함께 개최하는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폐소송 지원을 위한 바자회’로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합사 철폐 소송에 대한 의 추적 보도와 한-일-대만 평화·양심 세력의 연대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맹위를 떨치던 더위와 폭우가 뒷걸음질치고 소리 없이 가을이 닥쳤습니다. 9월15일 명동에서 독자분들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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