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발행인
교사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빠트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 진보적인 교사상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아이들과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교사상은 군사 파시즘 시절엔 진보적인 교사상이었지만 이젠 교사의 당연한 요건일 뿐입니다. 오늘 진보적인 교사는 자본의 가치관과 긴장하는 교사입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자본의 가치관을 가르치는 교사, 경쟁력을 이야기하고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을 위인이라 가르치는 교사는 옛날에 아이들을 억누르고 때리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가르치던 교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혁은 사악한 것
오늘 한국 사회가 미궁에 빠지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주화가 실은 자본화(신자유주의화)였다는 것,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한국은 민주화를 통해 국가권력이 자본을 거느리는(박정희가 이병철을 거느리는) 지배체제에서 자본이 국가권력을 거느리는(이건희가 노무현을 거느리는) 지배체제로 변화했다. 지배체제 자체는 그대로인데 그 내부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개혁’이라 부른다.
개혁은 폭압적인 군사 파시즘이 더 이상 인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게 되었을 때 지배체제가 내부의 구조를 변화시켜 위기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개혁은 사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군사 파시즘에 시달려온, 그래서 군사 파시즘을 타도하는 게 모든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한국에서 그 사악함은 매우 성공적으로 은폐되었다. 선거에서 자유롭게 한 표를 행사하고 대통령을 욕해도 잡아가지 않으며 군인들이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 죽이지 않는 세상은, 인민들로 하여금 심지어 거개의 인텔리들로 하여금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배체제의 목표는 지배의 방식이 아니라 지배다. 지배체제는 한 줌의 지배세력이 대다수 인민들의 피를 빨아 한없이 안락한 세상을 목표로 할 뿐, 그런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은 개의치 않는다. 지배체제 내의 가장 강경한 분파가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군사 파시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지배체제 내의 가장 유연한 분파가 전면에 나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기도 한다(개혁). 두 분파는 동지애로 뭉쳐 있기보다는 짐짓 죽고 살기로 싸우는 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배체제 내에서의 권력 다툼이자, 지배체제와 인민 사이의 정당한 갈등을 차단하기 위한 ‘좌우 쇼’일 뿐이다.
사회적 브레인스토밍 삼아 질문을 하나 해보자. 오늘 한국에서 조갑제가 더 해로운가, 강준만이 더 해로운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다. 아무리 강준만을 조갑제와 비교할까? 그러나 선입견을 버리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단연 강준만이 더 해롭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오늘 조갑제의 견해(이를테면 “주석궁에 태극기를 꼽을 때까지 진군!” 따위)는 더 이상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너무 낡고 ’구려서’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영감(살아 있는 화석)들에게나 소구되는 것이다.
실현 가능한 최선의 진보?
반면 오늘 ‘양식 있는 한국인들의 영웅’ 강준만은 진지한 사람들,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진보적인 경향의 사람들에게 소구된다. 강준만은 그런 사람들이 오늘 지배체제의 본질인 개혁을 “실현 가능한 최선의 진보”라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개혁에 희망을 걸었다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고 민주노동당이나 그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으로 옮겨갈 사람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차이에나 집중하게 만들어, 지배체제 손바닥 안에서 맴돌게 만드는 게 강준만의 역할이다.
조갑제보다 강준만이 더 해롭다는 말은 얼마나 악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만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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