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어린 왕자는 하루에 마흔네 번이나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별이 하도 작으니 의자를 조금씩 뒤로 밀기만 하면 보고 싶은 대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린 왕자의 가슴속에서는 마흔네 개의 해가 하늘을 건너며 노을을 짓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부러워했다. 어린 시절에.
예의 없는 호기심 천국 국민들
까마득히 잊었던 그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일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하소연하기를, 한국인이 ‘니네 나라엔 해가 몇 개냐’ 혹은 ‘니네 나라에도 해가 뜨냐’고 묻는다는 것이었다. 앗, 이것은 어린 왕자나 외계인에게나 해야 할 질문이 아닌가. 혹시 이주노동자들이 ‘지구’ 출신이라는 것을 깜박한 게 아닐까. 놀라운 것은 여러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진짜 몰라서 궁금한 것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질문은 몇 가지로 정형화해서 나눠볼 수 있다. 니네 나라에도 해가 뜨냐, 달이 뜨냐와 같이 자연현상을 확인하는 자연확인형. 니네 나라에도 자동차가 있냐, 냉장고나 컴퓨터가 있냐고 묻는 물질확인형. 니네 나라에서는 손으로 밥 먹냐, 화장실이 있냐고 묻는 생활문화확인형.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몇 살이냐,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느냐, 와이프가 몇이냐고 묻는 다짜고짜형 등이다. 그중 압권은 단연 ‘니네 나라에는 해가 몇 개냐’가 되겠다.
호기심 천국 국민들이라 그런지 도대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진짜로 궁금할 수도 있겠다. 방송사마다 내보내는 오지탐험 프로그램을 보면, 어느 섬에 사는 원주민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어찌 이상하게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니, 그 나라 사람들은 죄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냉장고 같은 것은 구경도 못한 촌놈이겠거니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즐겁게 상상이나 할 일이지 얼굴을 맞대고 물어보는 것은 또 무슨 취미냔 말이다. 이런 취미가 혹시 어릴 적부터 훈련받은 ‘생활환경조사’ 때문에 형성된 것은 아닐까? 학년 초마다, 선생님이 모두 눈을 감게 하고 묻지 않았던가.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냉장고, 텔레비전 있는 사람, 아버지 직업이…. 그때 어렸던 우리는 구겨지는 자존심을 숨기려고 손을 들었다 내릴 때, 혹은 한 번도 손을 들 기회가 없을 때도 바스락거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던가.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무조건 들이대서 물어보는 버릇, 분명히 ‘생활환경조사’에서 배운 것이렷다!
어처구니없는 햇님, 달님 타령이야 웃어넘긴다 하지만, 물질형이나 생활문화형, 다짜고짜형은 어떤 말투로 물어도 조롱으로 들릴 것이다. 이주노동자든 결혼이민 여성이든 자기 고향집 하늘에 해와 달이 안 뜨는 사람은 없지만, 냉장고나 세탁기가 없는 경우는 꽤 있고 간혹 전기 없이 생활해온 경우도 있다. 실제로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밥 먹는 문화도 있고, 화장실이나 목욕시설이 별도로 없는 생활환경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그런 것도 없는 데서 한국으로 와서 냉장고 구경하고 숟가락으로 밥 먹고 수세식 화장실 쓰니 ‘용’ 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수세식 화장실 쓰니 ‘용’ 된 거?
이주민들은 대체로 이런 질문을 곤혹스러워한다. 모멸감을 느끼고 상처받는다. 더구나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접하는 생활환경은 그리 좋지 않다. 대한민국 안에서는 누구나 깨끗한 생활환경을 누리고, 어디서든 비데가 뽀송한 엉덩이를 보장한다고 생각들 하겠지만 이주민은 지금도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컨테이너에서 취사를 하고 냉난방 시설도 없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 차별적인 박봉 때문에 스스로 생활환경을 개선할 여유도 없다. 우리 사는 세상이 평등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이주민에 대한 ‘관심’과 ‘말걸기’도 좋지만 예의도 적당히 갖추는 ‘센스’가 필요하다. 니네 나라에는 해가 몇 개냐고? 그런 것은 어린 왕자에게나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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