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2001년 9·11 동시테러가 벌어지고 나서 3년 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1년여 동안 미국 구석구석 1만500마일(2만4천km)을 여행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 그가 몸으로 만난 ‘21세기 미국’을 해부도처럼 풀어낸 책이 입니다. 여행 도중 레비는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위대한 서부의 총기류 쇼”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무기 전시회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배럿 82A1’ 50구경 라이플의 훈련용 버전이 8천달러에 팔리고 있는 사실을 목격합니다(배럿은 대인 살상용을 넘어 경장갑차를 잡는다고 알려진, 특수부대용 무기입니다).
그리고 레비는, 정말로 놀랍니다. 이 총을 사는 데 필요한 서류가 미국 시민권과 효력을 상실하지 않은 자동차 운전면허증뿐이라는 사실에. 책 제목인 ‘버티고’(Vertigo)가 뜻하는 ‘현기증’ 그 자체입니다.
레비와 비슷한 충격을 의 남종영 기자도 경험했습니다. 지난해 알래스카를 취재하러 간 남 기자는, 그곳의 대형 할인점 월마트에서 권총부터 장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총기가 버젓이 팔리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남 기자는 “심지어 아이들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총기류를 구경하는 것에 놀랐다”고 경험담을 얘기합니다.
이렇듯 미국은 총기 소유를 권리로 보장합니다. 미 버지니아공대에서 조승희씨가 일으킨 참극의 한 뿌리는 바로 총기의 일상화에 닿아 있습니다. 8살에 이민을 간 이후 16년 동안의 조씨의 성장 과정이나 정신질환 전력 같은 개인적 사유 등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총기 소유 문제를 빼고선 이런 대량 살인의 핵심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총기를 ‘공격 수단’으로 쓰게 만드는, 분열되고 파편화한 미국 사회라는 다른 뿌리가 존재합니다. 버지니아공대 참사와 비슷하게 1999년에 발생한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영화 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고발하려 했던, 미국 사회에 내재된 ‘공포와 공격’의 악순환 구조가 그것입니다. 양극화 심화와 이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안의 확대, 그리고 이를 껴안아낼 수 있는 사회복지 시스템의 부재, 그 속에서 커지는 개인의 좌절, 그리고 그 고통의 마지막 병적 출구가 된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레비는 미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으나 머릿속에서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는 무기 소유에 대한 집착을 “공포와의 병적 유희”라고 표현했습니다.
총기와 완전히 단절된 우리 사회인데도 이번 참사가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조승희씨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참사의 뿌리인 분열과 파편화, 통합력 부재가 우리 삶에서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 참사가 미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저 기우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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