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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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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를 기억하라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혹시 지난 2월11일 발생한, 이주노동자 열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보호소 화재 참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까마득히 오래된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그 참사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참사 당시 모든 언론은 이 사건을 전례 없이 크게 다루었다. 무려 ‘9시 뉴스 땡’ 소리와 함께 ‘여수보호소 화재 사건은’ 하고 시작하는 뉴스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대부분은 사건의 진상은커녕,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부상자와 버선발로 입국한 가족들이 어찌되었는지도.

“소 한 마리도 못 사는 돈으로 우롱”하는 정부

돌아가신 이들의 장례가 3월30일 치러졌다. 무려 50여 일 동안 희생자의 주검은 안치실에서, 부상 피해자들은 각자 치료받는 병원에서, 가족들은 여수병원 장례식장에서 분노와 오열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보상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부상 피해자들은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향후 발생할 후유증에 대한 불안도 큰 편이다. 더구나 사고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은,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이후로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가 될 것이다. 정부가 그 점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돈 몇 푼으로 몰아내듯 출국시키려 하자, 부상 피해자 가족들은 “소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우리를 우롱하려 든다”고 분노하며 노숙단식 농성에 나서기도 했다.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인 가족들은 찬 길바닥에 몸을 의지하며 ‘진상 규명과 치료 보장, 후유증 치료를 위한 체류 자격 부여, 공정하고 합리적인 배상,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아직도 검은 가래가 끓는 부상 피해자들도 병원에서 단식을 하며 힘을 보탰다.

참사 직후 언론은 많은 대책을 쏟아놓았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메아리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정부가 일부러 미적거리며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틈을 타 푼돈의 합의금으로 참사 자체를 없는 듯 파묻어버리려고 드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녕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부상 피해자들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부는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보고 진심 어린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주노동자 정책’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재발 방지에 대한 고민도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미등록 노동자 문제를 옳게 해결하는 정책이 바로 재발 방지 대책이 되는 것이다. ‘미등록 노동자 합법화’를 비껴갈 방법은 없다. 지금 상황이 지속되는 한, 당연히 미등록 노동자들은 계속 쫓기고, 여전히 단속과 추방은 지속되고, 보호소는 철옹성처럼 서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는 미등록 노동자들이 소리도 없이 잡혀가서 감옥 같은 보호소에 갇히고, 언제 어느 보호소에서 담당자가 열쇠를 깔고 잠자거나 컴퓨터 오락을 하는 사이 화재와 같은 사고로 또 희생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런 문제는 보호소 직원을 닦달하고 창살을 없앤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희생자들이 생전에 원했던 것

우리는 그 답을 ‘미등록 노동자 합법화’에서 찾아야 한다. 무려 20만 명이나 되는 이들이 숨어서 일하고 있는데 고작 단속과 강제 퇴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일손이 부족하다며 끊임없이 노동자를 새로 들이고 있지 않은가! 올해 초 정부는 외국 인력 도입 규모를 10만9600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왜 미등록 노동자가 20만 명이나 적체된 상태에서 대책 없이 신규 도입을 계속해 전체 이주노동자 수만 늘려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에 우선하여 미등록 노동자를 합법화하고 노동 기간을 연장해 합법적으로 일하도록 해서, 미등록 노동자 문제도 해결하고 노동력도 확보하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희생자들이 생전에 원했던 것은 ‘합법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었다. 어떠한 사회적 반성이나 재발 방지 대책도 없이 건성으로 장례만 치른다고 해서, 분노한 넋들이 이 한 많은 땅을 떠날 수 있을까. 입으로만 말고, 진심을 다해 사죄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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