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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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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고 말해요

등록 2007-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 권김현영 홍익대 강사

나도 가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자문 혹은 상담을 요청받곤 했는데, 그중 가장 곤란한 경우는 “이 사건이 성폭력이 맞냐?”는 질문이었다. 같은 술자리에서 같은 가해용의자에게 같은 종류의 말과 행동을 들었는데 한 명은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하고, 다른 한 명은 성폭력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제3자의 눈으로, 그리고 이런 사건을 많이 접했을 사람이 보기에 어떤지를 결정(?)해달라는 것이다.

“생리 중”과 “아직 무서워”

당연히 나는 모른다. 성폭력이라고 한 사람은 그동안 가해용의자가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를 종종 했다는 증거를 축적해왔을지도 모르고, 혹은 성폭력이 아니라고 한 사람은 가해용의자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상처도 줄 수 없을 만큼 기존의 성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급진적인 경험을 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은 말이라도 애인에게서 들으면 기분 좋은 칭찬이지만, 낯선 사람에게서 들으면 모욕적일 수 있듯이, 두 사람과 가해용의자와의 관계에 따라서도 이 사건은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대해 제3자들은 먼저 그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게 아니라, 왜 그것을 성폭력이라고 했는지, 그렇게 하면 피해자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지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이게 피해자 중심주의의 핵심).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핵심은 “싫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솔직하게 싫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크고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종종 나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느낌과 경험에 대해서 제3자의 인정을 구하는 걸 본다. “화날 만하지 않아?” “기분이 나쁜데, 그래도 될까?” “이것도 성폭력이 맞나요?” 타인의 인정 없이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는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째려보거나 툭 치고 지나가도, 여자들은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러세요?”라고 묻곤 한다. 강의하다가 여학생들에게 성관계를 맺기 싫은 경우에 어떻게 말하냐고 했더니 “생리 중”이라거나 “엄마가 집에 일찍 들어오랬다”는 답을 많이들 했다. 놀랍게도 남학생들은 이 대답을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아직 무서워”라고 말한다는 여학생도 있었는데, 나는 이 대답을 들은 남학생들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그 여학생이 아주 귀엽다는 듯이 씨이익 웃고들 있었던 것이다. (무서워하는 게 대체 뭐가 좋은 걸까.)

수없는 ‘가지 않은 길’

강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남성문화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여성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를 전달하고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상대를 무서워하거나, 엄마나 생리 핑계를 대면서 자신은 사실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고 에둘러 말하는 ‘여성적’인 태도로 순간순간을 넘기지만, 이것만으로는 강간문화를 바꾸어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여성적인 태도와는 걸맞지 않은 단호한 태도로 상대방의 행동을 “싫다”고 말하는 여성들의 존재는 드물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 “싫다”는 의사 표현을 “성폭력”이라는 법적 언어를 통해서만 할 필요는 없다. 또한 성폭력이라는 언어도 처음 이 언어를 한국 사회에 던졌을 때와는 달리 많이 변했고, 오염되기도 했다. 무서워하는 여성과 법적 언어를 방패로 싸우는 여성 사이에는 아직 가지 않은 길이 많다. 반격을 하거나, 상대를 무력하게 할 수도 있고, 소수자와 약자를 무서워하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겨우겨우 만들어낸 좁은 길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이번호로 ‘권김현영의 노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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