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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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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멸종위기를 맞을 때

등록 2006-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살아남기 위해 밤낮으로 일해도 해고의 함정에 빠지는 ‘유연화’ 시대… 노동이 산속의 고릴라처럼 서식처를 뺏기는 사회엔 민주주의도 없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헨리 포드 공장의 일관조립라인 일은 재미는 별로 없지만 임금이 괜찮았고, 흑인과 백인 빈민들한테 끊임없이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들은 한 시민이자 자동차산업노조 조합원으로서 얼마간의 자긍심과 위엄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한 미국 흑인이 이런 종류의 자부할 만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체는 군대뿐이다.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별로 흥미롭지도 않고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에릭 홉스봄) 한때 자동차 조립라인이 좌파 지식인들에게 매혹적이었는지 몰라도 노동자 자신한테 낭만적인 일터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정을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게 해준 ‘괜찮은 일자리’였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노동은 자산이 아니라 비용?

그러나 지금 노동자들은 무슨 귀신에 홀린 듯 ‘유연화’와 싸우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무슨 말인지 깨닫기도 전에 유연화는 이미 노동자들의 곁으로 다가와 삶을 파괴하고 있다. 정규직도 반은 잘린 목숨이 되어 아침마다 회사에 출근한다. 고용안정이 깨지면서 회사에 대한 헌신이 약해지고, “노동조합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면서 노조에 대한 신뢰도 사라지고 있다. 관리·감독자를 따로 둬서 열심히 일하는지 감시하고 통제할 필요도 없다. 일자리와 임금을 지키기 위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 유연화가 곧 노동규율이다. 한번 실직을 경험하면 임시·계약직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아지고, 따라서 다시 해고될 가능성도 커진다. 노동생애 내내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등골 빠지게 일해야 한다. 그래도, 아무리 밤낮으로 일해도 함정에 빠지는 노동자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의 문턱, 그 아래에 두터운 노동빈곤층이 저수지를 형성한다.

확산되는 하청·외주·용역은 시장과 가격 변동의 위험을 밑에 있는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분산, 전가하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홉스봄 식으로 말한다면, ‘어떤 특별한’ 층의 고임금·고용안정은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사람들’의 저임금·고용불안이란 희생을 안전판으로 삼는다. 20세기 헨리 포드 공장의 ‘높은 임금-높은 생산성-높은 투자’의 궤도는 더 이상 없다. 포드 공장이 시장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줘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였다면, 21세기의 자본은 ‘유연화’라는 불안과 공포를 앞세워 강제로 헌신을 끌어내고 있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포섭된다. 어쩌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가슴과 마음을 자본에 이미 빼앗긴 건 아닐까?

자본의 상품·경영전략에 따라 고용도 임금도 모두 바뀌고 있다. 깊은 불안과 혼돈이 지배하면서 말 그대로 “(과거의)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녹아내린다”. 상품을 많이 팔고 순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본에 더 중요한 관심사는 ‘주주 배당’과 시세차익이다. 이익을 노동자 교육훈련이나 설비에 재투자하는 건 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낭비’로 여긴다. 특히 기업마다 금융·재무부서가 경영을 주도하면서 노동을 자산이 아니라 감축해야 할 ‘비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1970년대 영국에서는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맥주와 샌드위치’ 간담회가 열렸다. 영국 총리와 노총 위원장이 수시로 만나 경제·노사 문제를 조율하는 자리였다. 그만큼 노동의 힘이 강했던 것일까? 노동조합이 ‘법 위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비판한 하이에크는 “모든 노동자들을 조합에 가입하도록 유도하고 또 고임금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노동조합의 당연한 목적이라는 사실이, 노동조합이 이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뭐든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돼왔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자본, 언론, 일부 국민도 하이에크처럼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본 앞에서 미인 경쟁 벌이는 노조

대처 총리는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일컬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대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말했지만, 사실 한국에서 노동의 힘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에 그치고 있다. 부여받은 특권도 없고 파워는 취약하고, 오히려 노동조합은 “임금삭감도 감수하겠다”면서 ‘미인 콘테스트’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파업 자제와 무쟁의를 선언하고 ‘생산성 동맹’을 맺고, 외국자본한테 달려가 “파업 않을 테니 투자해달라”고 노조가 앞장서 설명하는 일종의 미인 경쟁이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바닥을 향한 경주’ 그리고 유연화의 피로감 속에서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싸워도 노동조합은 늘 패배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뒤에 씁쓸한 분노만 남을 뿐이다.

지금은 기업은 물론 노동조합에까지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하는 슘페터적 경쟁의 시대다. 노동조합은, 둘러싼 환경이 나빠지면서 ‘산속의 고릴라’처럼 성장·생존할 수 있는 서식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했다고 노동조합의 힘이 크게 성장한 것도 아니다. 영국 신노동당은 “(영국 노총이 우리를) 디스코장에 데려가고, 술값을 대신 내줄 수 있지만, 다른 애인이 볼 수 없도록 구석 한켠에 자리를 잡아라”고 말한다. 유권자를 의식해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년에 접어든 영국 노총에 비해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 어느 활동가는 10여 년 전 “우리는 왜 노동운동을 하는 걸까?”라는 물음에 “노동운동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개조할 인적, 물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도 맞는 것일까? 노동이 주체 또는 파트너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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