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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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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에서 생활임금으로

등록 2006-09-02 00:00 수정 2020-05-03 04:24

1994년 저임금 노동자 생계임금을 쟁취한 볼티모어 노동계의 승리… 외환위기 이후 근로 빈곤층이 급증하는 한국도 최저임금 인상이 절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94년 12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생활임금’(Living Wage) 캠페인이다. 미국노동총연맹-산별노조회의(AFL-CIO) 볼티모어 지역 활동가들과 지역 교회, 소수민족 단체 등 도시의 여러 조직들이 한데 결합해 저임금 노동자 생계임금 확보를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들은 승리했고, ‘지방정부와 거래관계를 맺고 있거나 재정지원을 받는 민간업체는 연방정부가 정한 법정 최저임금보다 50% 높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명시한 생활임금 조례를 쟁취했다.

볼티모어의 선구적인 승리 이후 생계임금 캠페인은 미국 전역의 30개 이상 도시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10원조차 올려줄 수 없는 이유?

미 의회는 2차 대전 이후 노동자가족 생계비가 상승할 때마다 최저임금을 올려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절반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대 동안 최저임금은 줄곧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90년대 중반에는 4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미국에서 최저임금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이다. 대통령 선거나 주 선거 때마다 최저임금 인상이 논쟁거리로 등장한다. 노동운동 내부에서조차 운동과 사업을 배치할 때 최저임금을 말석에 제쳐놓았던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의 전국노동조합총연합과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도 2001년 춘투 때 ‘1천엔 캠페인’을 벌였다. 파트타임·임시직 노동자들에게 ‘시급 1천엔 이상 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40만 장의 전단을 전국에 배포하면서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1천엔’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개별기업 차원에서도 ‘1천엔 시급 보장’이 주요 요구로 제기되었다.

지난 7월 우리나라 최저임금위원회는 2007년 한 해 동안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시급 3480원(주 40시간 기준 72만7320원)으로 결정했다. 정부에 따르면 178만4천 명이 이 최저임금 수준을 적용받는다고 한다. 전체 노동자(1500만 명) 중 178만 명, 놀라운 숫자다.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전문직 고임금층이 9만6천 명(국민건강보험공단 2006년 자료)이라지만 ‘점점 더 공장 같아지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저임금층도 두텁게 형성되고 있다. 올해 최저임금 심의 과정에서 애초에 노동단체는 시급 4200원을, 사용자단체는 3175원을 제시했는데, 여섯차례에 걸쳐 수정안을 낸 끝에 최종안으로 노동계는 시급 3490원, 재계는 3470원을 제시했다. 매번 최저임금 심의 때마다 ‘10원’ 더 올리자 내리자를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10원’조차 더 올려줄 수 없는 이유로 사용자 쪽은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대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근거해 더 높은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경제위기 이후 ‘궁핍임금’을 받는 근로 빈곤층이 급증하고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최저임금은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금속노조는 2006년 산별 중앙교섭에서 산업 최저임금 83만2690원을 얻어냈다. 법정 최저임금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다. 보건의료노조도 ‘전체 노동자 통상임금의 50%’를 보건의료산업 최저임금으로 보장할 것을 주요 교섭의제로 제기했다. 사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의 경우 대공장 소속 비정규직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 중소 영세업체 노동자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처우가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최저임금 인상이 더욱 절박할 수도 있다.

의 저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노동으로부터 영원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노동과의 갈등적인 계급관계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자본의 오래된 꿈”이라고 말했다. 정보·통신혁명을 활용해 일자리를 줄이고, 정규직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것도 그런 꿈을 향한 것일까? 물론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자본은 자연히 노동자에 대한 투자를 늘려 생산성 향상에 나서야 하고, 이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결합(분리가 아니라!)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실제 최저임금 수혜자가 대부분 용돈을 벌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중산층’ 10대 청소년들이라서 최저임금을 올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본은 남성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내쫓고 대신 부인과 딸을 노동인구로 통합해 저임금으로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집안에서 첫 번째 소득자가 되고 있고, 가계소득 중 최저임금에 의한 소득도 계속 늘고 있다.

노조가 소득 불평등을 낳는가

최저임금 인상에 한사코 인색한 자본은 법인세 감면·규제 완화 등 ‘더 많은 특혜’를 국가에 요구하고 있다. 이미 국가는 민간기업이 제품을 개발할 때 치러야 할 연구·개발 비용을 상당 부분 부담해주고, 파산 위기에 처하면 정부가 개입해 막아주고 손실까지 보상해주고 있다. 자본이 집단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들, 예컨대 기초에너지·철도 운송·기반시설까지 국민들한테 거둬들인 세금으로 국가가 자본에 값싸게 제공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유리한 혜택’만 요구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인건비가 높아지고 노동 수요가 감소해 오히려 비숙련 노동자들의 실업을 증가시킬 것”이라며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유포하는 것이 한국의 자본이다.

“노조가 소득 불평등을 낳는 주범”이라거나 “노동의 힘을 제거하면 기업 경쟁력이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통념도 최저임금 싸움을 보면 근거 없는 것으로 금방 드러난다. 엄밀히 말해 불평등은 노동조합의 산물이 아니라 ‘규제되지 않은 노동시장’의 산물일 뿐이다. 오히려 금속노조·보건의료노조의 산별 최저임금 쟁취가 보여주듯 노동조합은 임금을 균등화시킨다. 볼티모어의 생활임금 캠페인을 “미국 노동운동이 잿더미에서 부활하는 신호”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국판 볼티모어’도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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