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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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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되 환영받지 못한 손님

등록 2006-06-14 00:00 수정 2020-05-03 04:24

노동과 불법체류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 강제추방을 피해 다니는 이주노동자들… 자본의 필요에 따라 ‘저임금 변방’ 형성하는 그들을 외면하면 저항이 온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몇 해 전 어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사진첩을 봤는데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을 풍경화처럼 스케치하고 있었다. 봄빛이 완연한 공장 앞뜰에서 풀꽃처럼 웃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속에서, 허름한 숙소에서 나뒹구는 이불처럼 쓰러져 자고 있는 낯선 노동자들 속에서, 담벼락에 기댄 작은 거울 속에서 동남아시아 청년들이 이발하고 있을 때 흑백 사진은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팍팍하고 서글픈 노동이라도 분노와 우울만 있는 건 아니다.

이주노동자도 한 사회의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아름다운 노동자들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임시적인 ‘손님 노동자’들은 노동의 굴레와 불법 체류의 굴레를 이중으로 안고 있는 ‘제3의 계급’이다.

돈 벌러 와서 투사되다

35살의 아노아르 후세인은 방글라데시에서 대학을 마치고 1996년 한국에 돈 벌러온 청년이다. 여느 이주노동자처럼 ‘코리안 드림’을 품고 온 가난한 나라의 평범한 젊은이였다. 여러 공장을 전전했으나 꿈은 점차 ‘이룰 수 없는 신기루’가 되었고, 그는 이제 명함에 민주노총 로고가 선명한 ‘투사’(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가 되었다. “현장에 직접 가보세요. 10년 전과 똑같아요.” 아직도 이주노동자를 착취·핍박·차별 같은 ‘인권’ 문제로 보는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달라진 것일까?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을 하듯 이주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도피’를 하고 있다. 강제추방이라는 일상적 공포 속에서 단속을 피하려다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또 저물도록… 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빛나고….” 80년대의 는 이제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불 밝힌 밤공장은 변두리 구석구석에 남아 이제 35만 명의 젊은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배낭은 가볍다. 이동하는 철새처럼 언제든 쉽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고, 강제추방을 피해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을 횡단해 온 ‘취업증 없는 노동자들’이 넘치면서 노동시장은 다국적화되고 있다. 자본에 색깔이 없다고 하지만 노동에는 피부색에 따른 인종적 선이 그어진다. 기존 노동운동 역시 상상력, 힘, 언어, 조직 모두 내국인 남성만을 중심에 두고 있었을 뿐 이주노동은 외면해왔다. 세계 체제 분석으로 잘 알려진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피부색은 본래 위장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이용하기 편리한 꼬리표였다. 피부색이라는 선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현상이었지 생물학적 현상은 아니었다. 인종차별주의는 체제 안에 있는 노동력을 위계질서에 따라 계층화하는 것이었고, 체제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체제 안에 묶어두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월러스틴이 정확하게 간파했듯,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동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그들이 한국에 왔다는 점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3D 업종 기피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일’은 안 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최하위 저임금’ 일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비용 삭감이 유일한 경쟁의 장소가 된 세계화 시대, 일본 기업들은 80년대에 사양산업을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다. 반면 한국의 중소 자본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대신 제3세계 노동력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발전 국가’ 한국을 따라잡으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산업연수생’ 명목으로 데려왔으나 이는 애초부터 핑계였다. ‘저임금 변방’을 만들고 불법 체류라는 딱지를 붙여 체제 안에 묶어두려고 했다. 주로 1∼3년간의 계약노동 형태인 이주노동력은 필요할 때 쓰고 일감이 없으면 놀려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 임금이 싸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비 같은 ‘임금 외 혜택’을 주지 않아도 된다. 내국인 노동자들이 비싸고 말 많고 까다로운 노동자들이라면 이들은 값싸고 유순한 노동자들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가족이 없고 혼자라서 휴일 노동을 시키기도 편하다. 그들은 우리가 초대하고도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국내 이주노동은 도시로 끌어들일 농촌의 값싼 노동력 공급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강남에서 일하던 필리핀 출신 가정부들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동안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사슬로 몸을 묶거나 목숨을 던지면서 한국 자본의 ‘양심’에 호소해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주노동력 유입에 따라 한국 노동력이 젊어지고 국내 기업도 유지되고, 이런 기업에 삶을 의탁하고 있는 내국인 일자리도 보장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생산·고용·임금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 소요사태는 남의 일인가

아노아르처럼 대학까지 나온 그들이 낯선 땅에 온 건 순전히 돈벌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친구나 가족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의 사회적 지위에 신경쓰지 않고 밑바닥 ‘하인 노동’ 일자리라도 감수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초기의 꿈이 멀어지고 실패한 이주노동자일수록 현지에 더욱 정착하게 마련이다. 이주노동의 역설이다. 이미 국내에도 인도네시아·네팔·스리랑카 공동체 모임이 만들어졌다.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정착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은 하나의 ‘소수민족’이 되고, 점차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생존권을 요구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마이크 데이비스는 에서 “미국 내에서 무려 5천만 명이나 되는 흑인, 스페인계 노동계급이야말로 미국의 기반을 안으로부터 와해시킬 수 있는 수적인 힘과 사회적 힘을 유일하게 갖고 있는 국가 안의 국가이며 사회 안의 사회”라고 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내전처럼 발생한 청년 이주노동자 소요사태가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생산의 외곽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자본과 내국인 노동 간의 ‘이익의 담합구조’ 바깥에서 피부색에 따라 새로운 불평등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반역의 불꽃’을 끊임없이 도시로 실어나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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