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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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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와 노동자의 삶

등록 2006-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협상에서 좀처럼 이슈로 부각되지 않는 노동분야 …족쇄를 벗은 자본은 노동자의 삶을 재앙으로 만든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현재 진행 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노동 분야는 좀처럼 이슈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협정문 초안에서도 노동장(Labor Chapter)은 맨 끝자리에 배치돼 있다. 세계화 과정은 자본이 주도하고 노동은 부차적인 당사자에 지나지 않아서일까? 흥미로운 건 양국이 이미 상당 부분 합의한 노동장이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 권리 보장’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제적으로 인정된 노동권 준수 노력과 무역·투자 유치와 촉진을 위한 노동 기준 저하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일까?

‘성장을 통한 평등’의 환상

미국은 FTA를 추진하면서 국내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데, 미국 노동계는 협정 때마다 당사국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해왔다. 국적을 불문한 모든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이 노동자 국제주의 정신에 따른 것이라면, 협정 상대국의 억압적 노동환경 금지는 미국 노동자들의 고용 안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값싼 노동력이 넘치게 되면 미국 자본이 지리적 재배치를 통해 한국으로 이탈하게 되고, 한국 상품이 저임금에 기반해 싼 가격으로 미국 시장에 들어오면 미국 산업이 위축돼 자신들의 고용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를 막으려는 미국 노동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 FTA 노동장이다. 무역·투자 촉진과 어울리지 않는(?) ‘노동권 보장’이 협정에 반영된 것도 이 때문이다.

FTA의 손익계산서에는 계량모형을 돌려서 나온 중·장기 국내총생산(GDP) 예측치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미칠 영향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물론 앞으로 ‘미국의 세기’가 저물고 미국 경제가 침체돼 상품을 팔아먹을 미국 시장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중·장기 효과에 감안돼야 한다. 그런데 노동은 생산물 시장의 ‘파생수요’다. FTA에 따라 산업 생산과 상품의 흐름이 바뀌면 노동자의 삶도 자연히 변화하게 된다. 미국이 FTA를 추진하고 있지만 1800년대에서 1945년까지 수입 제조업 상품에 대한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자본주의 역사에 관한 정통 경제학교과서는 영국·미국의 발전 원동력으로 자유무역과 자유방임 시장을 꼽지만, 어느 경제사학자는 미국을 가리켜 ‘근대적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이라고 묘사했다. 강력한 보호주의를 토대로 경제성장을 이룬 뒤 자국이 최강의 산업국 자리에 오르자 이제 와서 자유무역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무역이 자본 축적과 성장을 보장한 것인지, 아니면 자유무역이 ‘부분적으로만 되거나 덜 된 것’이 오히려 성장을 보장한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도 있다.

“자유로운 시장일수록 더 많은 성과를 낸다”는 도그마는 진실일까? ‘더 많다’는 산술적 의미에서 성장의 열매는 달콤하다. ‘성장을 통한 평등’의 꿈은 성장에서 희생되는 사람들까지도 매혹시켜왔다. 물론 환상이었다. “작은 빵을 지금 나누기보다는 더 빵을 키워 골고루 나누자”는 구호는 이를 실제로 집행할 공권력이 없는 한 격차를 더 키울 뿐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미국처럼 제1세계가 될 것’이라던 멕시코 노동자들의 꿈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 빈민과 소수의 부유층이라는 분리되고 불평등한 두 개의 사회를 만들었을 뿐이다. 일부가 ‘높은 대중소비’ 대열에 끼어들고 중간층과 상층의 격차가 줄어들자 이를 꿈의 실현이라고 불렀지만, 상위 15%와 나머지 85% 간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 현실은 그 뒤에 숨어버렸다. 한미 FTA는 발전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북극성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는 “토끼는 한 평의 풀밭에 만족하겠지만 사자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미 세계화의 선두에 선 ‘초국적 자본’으로서 국내 대자본에는 적절한 비유다. 유엔무역개발회의가 펴낸 에 따르면, 전체 자산 대비 해외 자산, 전체 매출 대비 해외 매출, 전체 고용 대비 해외 고용 비율을 모두 더해 평균을 내본 결과 삼성전자는 이 비율이 44.1%, LG전자는 46.8%, 현대자동차는 25.1%에 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초원은 어떤 곳인가? 먹고살기 위해 더 힘든 노동을 하고 하루, 1년, 일생의 노동시간이 더 길어지는 세상은 아닐까. 한미 FTA는 시장이 국가의 규제·개입과 노동의 저항 같은 거추장스런 족쇄를 벗어던지고 무역·투자의 국경이 사라진 신세계에서 마음껏 활보하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자본은 축적을 위해 항상 자신의 경계를 넘어 현관 바깥으로 모험을 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만물의 상품화 경향’은 자본주의 역사에 집요하게 나타나는 추세다. ‘상품화’는 별게 아니다. 공적 영역인 교육·의료 서비스를 이제는 대가를 주고 구매해야 하고, 지불하는 돈에 따라 품질이 차별화되는 것이 상품화다.

노동의 방어적 투쟁 분출하는 21세기

경제사학자인 칼 폴라니는 에서 “19세기 100년 역사는 한편에서는 시장통합을 앞세운 상품시장 확대 운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의 횡포에 맞서 노동계급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대항운동에 나선 ‘이중 운동’이 지배했다”고 말했다. 20세기에 노동과 자본이 상품화와 ‘탈상품화’를 둘러싸고 계급타협을 했다면, 21세기에는 시장 확대에 맞서 기존 생활양식을 지켜내려는 노동의 방어적 투쟁이 여기저기서 분출하고 있다. 반세계화 저항이 대표적인데, ‘21세기적 이중운동’이라고 할수 있다. 지금 노동세계는 상시적 고용불안이라는 깊고 폭넓은 변화를 겪고 있다. 한미 FTA는 또 한 번의,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노동세계에 초래할 것이다. 그 변화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빈곤이라는 지속적 공포가 될 공산이 크다. 자유시장과 복지 삭감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모델은 노동자들에게 재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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