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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와 임금의 ‘동반자살’

등록 2006-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괜찮은 일자리 사라지고 저임금 여성 및 서비스직 확대되는 불안 시대… 기업들이 고용보장 대가로 임금 삭감 요구하며 ‘노동의 양보’ 짜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최근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5년 전에 정리해고돼 공장을 떠났던 노동자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놀랍게도 정리해고된 1725명 중에서 연락이 끊긴 80여 명을 빼면, 공장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노동자는 고작 10여 명에 불과하다. 이미 세상을 뜬 대여섯 명을 빼면 거의 모든(!) 노동자가 공장 복귀를 선택한 셈이다. 대기업 자동차 조립공장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사내복지도 좋긴 하겠지만 사실 공장 생활은 고질적인 스트레스에 팍팍하고 고단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GM 린든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1980년대 중반에 명예퇴직한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을 조사·연구한 루스 밀크맨은 <공장이여 잘 있거라>라는 책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당수 노동자들은 공장을 우울하고 감옥 구멍 같은 ‘지랄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고, 하루빨리 공장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고 썼다.

“너무 밀어붙이면 해외로 나갈거야”

“공장 일이 힘들긴 해도,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좋은지 예전엔 몰랐어요.” 정리해고 뒤 5년간 사실상의 실업 상태에 빠져 있던 부평공장 한 노동자의 말은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고용불안-저임금 일자리만 남은 한국 노동자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즘 노동자들에게 경영 참여니 사회적 타협이니 하는 말은 그저 레토릭에 그칠 뿐이고, 일할 수 있는 ‘한 짝의 장갑’이 더 소중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임금노동자는 1500만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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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소멸되고 있는데도 취업 노동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제조업 일자리가 파괴됨에 따라 근육을 쓰는 남성 육체노동자들이 못쓰는 기계처럼 폐기되는 대신 저임금 여성 및 서비스직 일자리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300명 이상 대기업의 일자리는 1997년 180만9천 명에서 2002년 162만4천 명으로 줄었다. 각국은 국내 실업을 줄이기 위해 전세계를 무대로 이동하는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고, 반대로 그렇게 자본이 빠져나간 국가는 제조업 공동화에 따라 실업이 증가한다. 과거에는 자본수출이, 이제는 이른바 ‘실업 수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자리를 잡기도 힘들고 어렵사리 잡은 일자리도 다들 비정규직인 ‘일자리 불안 시대’는 광범위한 ‘노동의 양보’를 동반한다. 임금 삭감과 생활 수준의 하락을 낳는 ‘양보 협상’ 물결이 휩쓸고 있는 것인데,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저임금 노동자층은 좀더 나은 일자리에 있는 노동자들의 협상력까지 약화시킨다. 임금 교섭 테이블마다 “임금 삭감을 수용하지 않으면 공장을 폐쇄하겠다” “임금과 고용안정을 맞교환하자”는 회사 쪽 요구가 올라온다. 수익성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기업뿐만 아니라 건강한 기업들까지도 공장 폐쇄 운운하며 임금·복지 반납을 요구한다. 고용불안 앞에서 임금 양보는 ‘강요된 선택’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회사를 너무 밀어붙이면 공장 문 닫아버리고,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해외로 나가버리면 그만이야.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양보를 되풀이하면서 이미 허약해진 노조는 구조조정과 세계화라는 더 복잡한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사실 세계화는 노동자들에게 재앙에 가까운 것이다. 세계화의 또 다른 축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만 봐도 ‘더 강한 외부의 힘’을 빌려, 그동안 국내 노동세력 등이 쟁취한 제도와 관행들을 죄다 파괴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기업들은 아예 “이제는 어느 회사 노동자가 더 많이 임금을 양보하느냐에 따라 세계시장의 가격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언제까지 ‘임금착취형 공장’을 앞세워 싸울 것인가?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순익을 냈음에도 ‘매출액 대비 인건비’는 임금삭감·비정규직 확대에 따라 1997년 12.0%에서 2003년 8.9%로 떨어졌다. 노동소득분배율도 1996년 63.4%를 정점으로 계속 하락해 2004년 58.8%로 떨어졌다. 노동자 전체 임금이 4.6% 줄었는데, 그만큼 사용자가 더 많이 가져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동가격(임금)을 삭감해 노동 비용을 억누르고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를 내쫓는 식의, 즉 노동자 희생을 바탕으로 수익성을 회복하겠다는 ‘경쟁적 긴축’은 결국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고 따라서 국내 수요도 떨어져 제품도 안 팔리기 때문이다.

‘완전취업 빈곤층’까지 나타나

과연 “조직노동(노조)의 임금 요구가 수익성을 위협할 정도로 이윤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말하는 기업들의 볼멘소리는 사실일까? 임금은 노동과 자본 간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이제 전적으로 ‘자본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고용 위협 앞에서 ‘생산성 동맹’은 더 이상 자발적 선택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임금 상승을 자제하고 생산성 향상에 매진하겠다는 동맹을 좋든 싫든 회사 쪽과 맺어야 한다. 임금 인상을 따내지 못하는 노동조합이 늘고, 그래서 노조에 대한 노동자의 신뢰는 더 약화된다. 실질임금이 정체 또는 하락하면서 이제는 ‘완전취업 빈곤층’까지 나타나고 있다. 가구 내 취업자가 2∼3명이나 되는데도 빈곤을 느끼고, 부족한 소득을 벌충하려고 더 오래 일하든지 더 많은 식구들을 일터로 보내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실제 근로시간은 2005년에 연간 2341시간으로 세계 최장이다. 그런데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측정되지 않는 노동 투입’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강도 강화는 경제위기 이후 더 심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각 산업에서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했던 1970∼80년대 스웨덴 연대임금 정책 모델은 노동운동의 평등주의 이상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저생산성-비효율적인 임금착취형 기업의 퇴출과 합리화를 유도해 스웨덴 경제를 역동성 있게 만들었다. 소중한 ‘한 짝의 장갑’을 지키기 위해 한국의 자본과 노동이 어떤 지혜를 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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