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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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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둘러싼 투쟁

등록 2006-05-04 00:00 수정 2020-05-03 04:24

다시 돌아온 메이데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떨쳐 일어난 노동자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생애에서 온 가족이 밥먹을 시간도 없게 만든 세계화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동료들과 함께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프레드 톰슨,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전기적 에세이>에서)

머리와 가슴이 지배당한다

5월1일, 다시 돌아온 메이데이(노동절)다. 1886년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복종과 침묵을 깨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던 날인데, 당시 폴 라파르그(1883)는 “밥 먹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 쉼없이 노동하는 작업장은 공포의 집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세계 노동운동 150년의 역사는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였다.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이자 ‘가족 시간’ 확보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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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술집에서 “여기서까지 공장 이야기냐?”고 말한다. 깔끔하고 쾌적한, 잘 정돈된 오피스텔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도 자기가 일하는 사무실을 ‘공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농담이 섞여 있지만 상징이기도 하다. 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 일터는 ‘피곤한 공장’일 뿐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너무 일에 지쳐 술집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그래야 노동력을 재생산해 ‘공장’에 돌아가 다시 일할 수 있다. 놀러가서도 지칠 때까지 ‘진탕 먹고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한국인의 기질이라기보다는 세계 최장 노동시간이 만들어낸 우울한 풍경이다. 여가 시간조차 ‘노동을 위한 준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는 여가 시간을 TV 시청, 수면으로 다 보내고 건강관리·학습·지역사회 활동 참여 등에 쓸 시간은 거의 없다. 일에 충분히 지쳐 있으므로 쉬운 것,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게 되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사색해야 하는’ 문화·책·영화는 좀체 팔리지 않는다.

우리는 공장에서 기계들에 매달릴 때 디젤 엔진의 부품들뿐만 아니라 협력과 지배의 관계들, 그리고 그런 관계에 대한 ‘동의’까지 함께 생산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의 생애는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게 종속된다. “자본은 위험을 피하는 겁쟁이다. 그러나 상당한 이윤만 있다면 자본은 과감해진다. 10%의 이윤이 보장되면 자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자된다. 20%라면 자본은 활기를 띠며 50%라면 대담무쌍해지고 100%라면 인간의 법을 모두 유린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300%라면 단두대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범하지 않을 범죄가 없다.” 사실 멈추고 있는 건 자본이 아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므로 노동을 끝없이 빨아들여 상품화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가 역시 자본의 ‘인격적 화신’에 불과하다.

이제 자본의 생애는 ‘세계화’로 대표된다. 세계화 물결에 따라 자본과 노동은 모두 재배치되고, 글로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하청기업에 대한 약탈적 하도급과 불안정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 삶의 불안정을 하청 회사와 다른 노동자들의 어깨에 전가하는 체제가 세계화다. 정보기술(IT) 산업이 성장동력 확충에는 기여했으나 양극화를 더욱 심화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은 예전에 노동자를 시장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던 국가와 사회협약의 족쇄를 벗어버렸다. 과거의 ‘병영적 통제’도 이제는 필요 없다. 노동자들의 머리와 가슴이 스스로 ‘시장의 경제적 채찍’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할수록 분배는 악화되고, 부의 축적을 위해 다른 쪽에서는 빈곤의 축적이 일어나고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전형적 업적은 값싼 의류, 값싼 구두, 값싼 자동차 등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부자보다는 공장 여공들이 더 많이 명주 양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용카드 할부판매로 대표되는 ‘소비주의’에 포섭된 노동자들은 물질적인 계급타협을 하는 대신 정신은 단순화되고 빈곤해진다. 광고를 통해 낭비와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는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의 피로가 쌓이게 된다.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월급쟁이 사장부터 말단 샐러리맨까지 밤과 주말 노동에 나서는데, ‘시간주권’을 빼앗긴 셈이다. 아침·저녁에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 밥 먹는 횟수는 줄어들고 가족의 시간도 헝클어지고 있다. 이제 ‘빵을 벌어오는 사람’은 남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노동의 생애에서 아내도 아들딸도 돈벌이에 나서야 한다. 일생을 자본이 요구하는 ‘단순노동’에 바치는 사람들은 창조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고, 용기도 잃고 인간으로서 둔해지고 무력해지기 쉽다. 사실 첨단 과학기술 혁명에 따라 기계가 복잡해지고 더 많은 지식이 적용될수록 노동자들은 아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그 기계를 이해하거나 제어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일에 취한 사회’를 말하라

노동절은 집단 또는 정치적 세력으로서 ‘노동자의 힘’을 보여준 날이다. 그런데 한국 노동자는 왜 집단으로서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삼성 이건희 회장도 1표이고 노동자도 1표다. 이런 ‘1인1표’는 의회주의 선거를 통해 노동계급이 정치적 이익대표 체제를 선택하고 ‘노동자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희망은 금세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누가 그랬던가.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이 아니다”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취약하면 현실적인 세력의 약화를 가져온다. ‘일에 취한 사회’에 대한 도전은 행동 못지않게 ‘말’과 ‘언어’를 통해 사상적으로도 치열하게 전개돼야 한다. 문제는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가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있듯, 활발한 논의와 정치적 기획을 통해 ‘세계화 시대의 노동과 인간의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문제 제기해야 한다. 그러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문화비평가로, 정치평론가로 사는 삶’이 가까워질 수 있다. ‘시간을 둘러싼 투쟁’은 여전히 지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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